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 교수초빙기념 인터뷰

지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4년간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했던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우리대학 교수로 초빙됐다. 박 교수는 지난 1993년 우리대학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지난 2016년에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헌법질서 수호에 이바지한 공로’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지난 10일에는 한국정치와 헌법재판을 주제로 초빙기념 특강이 진행됐다. 서울시립대신문은 박한철 초빙교수의 교수 초빙을 기념해 특집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주-

 

 

우리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일하게 된 소감은
서울시립대학교와의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지게 됐다.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과정까지 모두 시립대에서 마쳤다. 검사 업무하고 병행하다 보니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2016년 시립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줬다. 이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 갚아야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김대환 법학전문대학원 원장님이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을 해주셨다. 학구적인 활동을 시립대에서 했고, 같이 공부하는 후배들도 있으니 초빙교수 생활이 보람찰 것 같다.

어느 분야의 강연을 맡게 되는지
‘헌법특수판례연구’라는 제목의 강의를 맡는다. 헌법학의 실무적인 쟁점과 같이 학문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미세한 부분들을 짚는 강의다. 헌법재판의 성격상 사회적, 정치적 사안을 많이 다룰 수 밖에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헌법재판에는 사회 전반적인 고려가 동반돼야 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은 단순한 헌법학 강의를 통해서 얻기 힘들다. 헌법적 가치를 실무에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학생들이 질문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학생들이 이번 강의를 통해 다양한 시각에서 헌법재판을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고, 일반적인 학문이 접근할 수 없는 헌법학의 측면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치려 한다.

검사 생활을 길게 했는데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인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 힘들고 기억에도 많이 남는다. 과거 노무현 정부 당시 권력형 비리 사건 중 하나인 ‘유전 게이트’ 사건의 수사를 맡았을 때였다. 국민들의 관심이 쏠린 사안이다 보니 기자들의 취재 경쟁이 치열했다. 문제는 언론에서는 전혀 사실이 아닌 사항에 대해 추측성 보도를 하다 보면 실제와 다른 오보도 많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사건을 지휘하는 담당자로서는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기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같이 약속을 했다. 기자들 요구를 다 받아줄테니 수사된 내용에 맞춰 같이 보도를 해줬으면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수사보다 먼저 앞서나가서 증거로써 입증되기 전 단계에서 보도되면 사실과 달라질 수도 있는데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진실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의 본 역할에도 벗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 대신 수사 속도에 맞춰 기자들이 알고자 하는 사실 여부에 대해선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기자들이 그때 추가로 요구사항을 몇 가지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오전 10시, 오후 2시 매일 2번씩 브리핑을 해달라는 것, 다른 하나는 기자들이 전화로 묻는 사항에 대해서는 무조건 받고 답해줄 것 두 가지였다.
그러다 보니까 전화가 많이 올 때는 150번도 오더라. (웃음) 기자들이 밤낮없이 전화하다 보니 새벽 2시에도 전화를 하고, 휴일에도 수없이 전화를 받았다. 나중에 가서는 언론사 기자들하고 신뢰 관계가 만들어져서 비교적 순탄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보도 많이 줄어들고 기자들도 나중에 고맙게 생각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에 수사에서도 그때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됐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안을 다루면서 느끼는 부담감은 어느 정도인가
부담감이 엄청나다.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을 맡으면 언론이나 정치권 등 외부와의 관계가 수사에 버금가게 중요해진다. 이런 사건을 맡게 되면 여야를 비롯한 정치권이나 언론 등 사회의 모두가 얽혀있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듯한 기분이 든다. 검사 소신껏 정의에 따라 법을 실천하기 위해선 고도의 머리싸움이 필요하다. 검찰 내부에서는 상급자를 설득해야 하고, 언론에 대해서는 사건이 공정하게 제대로 수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만 언론이 제대로 된 보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하나하나 모두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주어진 방정식을 지혜롭게 잘 풀어야 과정, 결과가 공정해지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다.

헌법재판관이 된 계기는
석사과정 시작이 아마 89년쯤 이었다. 1985년 독일 막스 플랑크 국제형사법 연구소에 파견근무로 나갔다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연계 과정을 통해 강의를 들었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들었는데, 심지어는 법의학 강의를 듣고 부검을 어떻게 하는지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그때 당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이었던 교수의 헌법학 강의를 듣고 관심이 크게 생겼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헌법재판소가 생기기 전이었다. 헌법학 강의에서 헌법재판소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당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우리나라도 헌법재판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거기서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이때 가졌던 관심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는지 96년에 헌법재판소에 연구관으로 일하게 됐다. 헌법재판관, 재판소장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여기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재판소장이 됐을 때 이를 바탕으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와 교류를 시작하기도 했다.

헌재소장으로서 기억에 남는 사건은
역시 힘들었던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통합진보당 해산사건이다. 굉장히 힘들었었다. 내 기억으로는 사건 기록이 17만쪽에 기록을 전부 쌓아놓으면 10m가 넘는 분량이다. 그때는 재판소장실이 기록으로 가득 찼었다. 변론을 18차례 진행했는데, 한차례 변론할 때마다 거의 2만 쪽의 기록을 읽었다. 치열하게 다투던 사항이었기에 재판 진행도 다른 사건에 비해 훨씬 힘들었다. 진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증인을 신문하고, 다양한 기록을 확인했다. 결국 정당의 목적과 활동이 헌법에서 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된다고 보고 정당해산 결정을 내렸다. 정당이 어떤 형태든 어떤 이념을 따르든 인정한다는 것이 우리의 헌법정신이다. 하지만 극좌나 극우와 같이 헌법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경우에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메시지고, 헌법재판의 취지이기도 하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건 위안부 사건이다. 한일청구권 협정 제3조는 협정 적용에 논란이 있을 때 외교적 통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이후 해당 협정의 적용을 받는지 양국의 의견이 분분한데도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법적인 논리를 구성하는게 쉽지 않았다. 법적 논리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위안부 사건이 갖는 국제적 의미에 대해 많은 분석을 했다. 국제적 범죄,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권 침해 문제라는 점에 대한 의견을 상세히 작성했으나, 해당 사건과 같이 선고한 원폭피해자 사건과의 논리적 균형상 부득이하게 결정문에 추가하지 못했다.
최종 결론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임기가 종료됐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특히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돼있는 국가위기상황이라는 점에서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야 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무게가 중한 만큼 허투루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아주 많은 차례의 변론을 거쳤다. 헌법재판소에서 이런 사건들을 맡으면서 눈도 많이 안좋아졌다. 안경을 3번정도 바꿨다. (웃음)

헌법재판관 개인이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까지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개별적인 사안의 진실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살펴본다. 사실관계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 간통죄의 경우를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판결 과정에서 위헌법률심판이나 헌법소원이 들어오면 그 재판의 자료를 같이 받아볼 수 있다. 간통의 경위나 부수적인 기록은 이 기록에 담겨 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가 온전히 담겨있지는 않다. 이때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관련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추가적으로 조사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인지, 아니면 그 배경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인지 모두를 따져봐야 한다.
이후 자료가 축적되면 이를 토대로 제도 자체에 문제점이 있는지 알아본다. 일차적인 판단의 결과 위헌의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면 위헌 판결시 벌어질 파급효과나 부작용이 무엇이 있을지 살펴본다. 간통죄의 경우에는 간통죄 자체가 약자 보호 측면에서 충분히 제도적 기능을 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결혼관계 파탄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 이혼을 위해 간통죄를 악용하는 경우를 많이 찾았었다. 약자 보호의 측면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헌 판결을 내렸을 때 부작용이 적고 긍정적인 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면 다음단계로 넘어간다. 위헌 입장을 견지하고, 위헌 결정이 이루어졌을 때의 법적 효과를 고민해 본다. 법적 효과가 너무 광범위해서 이전에 간통죄로 처벌받은 사람까지 재심을 신청하게 된다면 현실적으로 문제가 벌어질 것이다. 다행히 간통죄의 경우에는 이전에 합헌 판결을 한 적이 있고 합헌결정을 한 다음날까지만 소급효가 미치도록 법이 개정되었으므로 그 이후에만 소급효를 적용받도록 할 수 있었다. 국민들의 여론과 법 감정을 살펴보고 우리 사회가 위헌 판결을 감내할 정도가 되는지 다시 한번 걸러본 뒤 반대 입장에서 법적 논리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본다. 만일 반론이 논증과정을 통해 소화할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면 최종적인 입장이 된다. 사실관계 확인에서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이렇게 재판관들이 자신들이 정한 의견을 가지고 오면, 이를 하나의 입장으로 모으기 위해서 수많은 토론을 거친다. 예전에는 멱살을 잡는 수준까지 간적도 있다고 한다. (웃음) 어렵고 복잡한 사건일수록 더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더 좋은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헌법재판관 임기가 끝나고 휴식기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그때 탄핵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이라 나에게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사건을 직접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를 하고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숨바꼭질도 많이 했다. 심지어는 한 달 이상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 달쯤 지나 괜찮겠거니 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아파트 계단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새벽에 앉아있더라. 그래서 다시 지방으로 향했다. 탄핵 재판 끝날 때까지 일체 전화를 끊고 살았다. 국가 내의 최대의 쟁점이 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재판 과정이나 밖이나 말 한마디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서울대 초빙교수로 가게 됐다. 6개월 이상 그런 생활을 지냈는데, 학교에 가서도 계속 기자들이 찾아와서 문을 잠그고 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검사, 재판관 생활하면서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기자들을 문전박대하기가 그렇더라. 인터뷰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다른 이야기만 하고 가게 했다. 지금도 기자들이 옛날 이야기를 들으려 찾아오긴 하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자제하고 있다.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때만 해도 유학 휴직이 인정되지가 않았다. 휴직하려면 사표를 쓰라고 하더라. 고민하다 결국 학업의 꿈을 접고 공직 생활로 돌아왔다. 그러던 차에 공부를 계속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 처음으로 시립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건물 수도 적고, 빈 공간도 많고. 지금은 건물 자체가 늘어나고, 학생수도 무척이나 많이 늘었다. 전보다는 훨씬 더 활기찬 분위기인 것 같다. 하지만 캠퍼스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 자체가 달라지지 않았다.  큰 변화가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

학생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학생들은 미래의 지도자다. 더군다나 로스쿨생은 법률전문가로 활동을 하고, 로스쿨생이 아니더라도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그 분야의 가치를 창조해 내야 한다는 것과 같고, 법률에 있어서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는 가치 수호자가 돼야 한다. 어떤 가치를 목표로 추구하고 어떤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지가 그 사람의 성공 여부를 가른다. 단순히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현실 순응적 태도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지 않는다. 학생들은 미래의 지도자로서 가치를 창조하고, 헌법적 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미래를 계획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았으면 한다.


글_ 이정혁 기자 coconutchips01@uos.ac.kr
사진_ 김세훈 기자 shkim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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