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울, 1964년 겨울』]

 
겨울이면 지하철역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바로 구세군 자선 냄비에 자원봉사자들이 기부를 독려하면서 종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외에도 크리스마스 씰, 사랑의 열매 등 겨울이면 생각나는 기부문화가 있다. 그런데 왜 여름보다는 겨울에 이런 기부문화가 많은 것일까. 아마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도 고역이지만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는 비할 바가 못 되기 때문 아닐까.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추위는 결핍을 상기시키고 고립감을 심화한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병든 사회와 무기력한 개인을 동시에 고발한다. ‘나’는 냉소적인 성격을 가진 ‘안’이라는 대학원생과 아내와 사별한 낯선 사내와 만나 서울을 배회한다. 이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를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차피 개인의 문제는 개인에게 속할 뿐 나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냉소가 이들의 사고에 깊숙이 인박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낯선 사내는 자살하지만 ‘나’와 ‘안’은 사내의 자살에 동요하지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서로 갈 길을 간다.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문학과지성사, 2019
소설의 서사 자체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겨울과 공간적 배경인 서울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왜 하필이면 봄, 여름, 가을도 아니고 겨울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앞서 언급했듯, 겨울이야 말로 ‘소외’라는 현상을 다루기 가장 적합한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울일까. 이는 당시의 서울이야 말로 개발과 번영이라는 광휘와 개인화와 소외라는 음영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의 서울은 파편화된 개인들의 욕망이 난맥처럼 얽힌 사회였던 것이다. 다소 황당한 가정이겠지만 작가 김승옥이 55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서울, 2019년 겨울’이라는 이름의 소설을 썼다면 그 내용은 어땠을까. 이들의 직업이 다소 다르고 이들의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낯선 사내의 죽음’이라는 결말 자체는 똑같지 않았을까.

SNS의 발달이 사람들과의 연결을 담보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생각과 감정의 공유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은 마치 시간과 노력 없이도 쉽게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러한 환상 이면에는 누구와도 온전히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소외된 이들이 완전히 사회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이번 겨울에는 우리 주변에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떨까.


김세훈 기자 shkim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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