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 교수에게 묻다>

▲ 고려는 몽골(원)의 일부가 아니었다. 지도에서 두 나라는 다른 색으로 칠해져야 한다.
2019년은 고려가 몽골과 국교를 맺은 지 800년이 되는 해다. 두 나라는 1219년 형제맹약을 맺었고 이것이 고려와 몽골의 첫 외교 관계수립이다. 둘의 관계를 흔히 고려의 ‘려’와 몽골의 ‘몽’을 따와 ‘여몽관계’라 칭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맹약을 맺을 당시 고려는 몽골을 ‘오랑캐 중에도 가장 강하고 흉악한 종족’이라고 인식했다. 그랬던 고려는 어쩌다 몽골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 관계는 어떻게 이어졌을까. 우리대학에서 고려사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에게 물어봤다.

군사 작전에서 출발한 형제 맹약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은 강동성 전투에서 이뤄졌다. 당시 거란족은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몽골군을 피해 고려를 침략했다. 이 전투에서 몽골이 고려를 지원하는 군사를 보내 고려군과 몽골군은 연합해 공동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강동성에 자리 잡은 거란족은 그들이 강동성에 들어간 지 1년 만인 1219년에 소탕됐다. 이때 몽골이 형제 맹약을 먼저 제안하고 이를 고려가 받아들임으로써 두 국가 간 처음으로 공식적인 관계가 맺어졌다. 몽골이 형이고 고려가 동생인 관계였다.

고려가 동생이었다는 점에서 혹자는 굴욕적인 국가 관계를 반발이나 저항 한번 없이 받아들인 고려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등을 기초로 한 국가 관계는 근대 이후 생긴 개념이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익주 교수는 “지금은 국가의 힘에 상관없이 모든 국가가 평등한 주권국으로서 관계를 맺지만 전근대 국가 관계에서는 위계질서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며 “당시 여몽 간 체결된 형제 맹약을 판단하려면 이런 전근대 국가 관계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형제 관계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는 “유목민들은 국가 간 위계질서를 형제, 숙질, 부자 관계 등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로 표현했다. 이 중 형제 관계는 불평등 정도가 가장 덜한 관계”라며 “형제 맹약은 몽골이 고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게 평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갈등과 전쟁

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여몽관계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형제 관계에 대한 두 국가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고려는 몽골과의 형제 관계를 이전에 금과 맺은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몽골과의 관계 전 고려가 금과 맺은 형제 관계는 유목민들의 형식이긴 했으나 중국식 의례가 가미된 것이었다. 불평등한 위치에서 조공하되 책봉을 받지는 않는 관계,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선에서 양국 간 평화가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몽골의 생각은 달랐다. 몽골이 생각한 형제 관계에 중국식 의례는 전혀 없었다. 이 교수는 “몽골 사신이 품에서 편지를 꺼내어 왕의 손을 잡고 주려는 등 고려 입장에서는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며 형제 관계에 대한 양국의 생각에 큰 차이가 있음을 설명했다.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일에 고려는 몽골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여겨 불쾌해했다.

이로 인해 갈등이 쌓여만 갔고, 그 와중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누군가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는 여진의 짓이라 주장하고 몽골은 고려의 짓이라 주장하며 두 나라가 충돌했고 결국 전쟁이 시작됐다. 고려는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해 약 30년간 전쟁을 이어나가다 몽골에 조건부 항복을 했다.

▲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
새로운 관계 수립과 고려의 지위

고려가 몽골에게 항복하며 끊어졌던 관계가 재수립됐다. 관계를 다시 맺기 이전, 고려와 몽골은 각자 조건을 제시하며 항복 후 여몽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을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당시 몽골의 지도자였던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의 옛 제도와 풍습 유지를 보장받았다. 유라시아를 아우른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을 상대로 고려는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여몽관계에서 고려의 위치를 두고 고려가 정말 독립국이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구글에 ‘원나라(大元)’ 혹은 ‘Yuan Dynasty(원나라)’라고 검색하면 고려가 원나라의 영토로 표기된 지도가 쏟아져 나온다. 원나라는 쿠빌라이 칸이 몽골제국 중 중국 영토를 중심으로 세운 나라다. 즉, 지도는 고려를 몽골제국 영토의 일부로 그린 것이다. 고려는 정말 원나라의 일부분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려는 원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는 전쟁 후 고려와 몽골 간에 맺은 책봉-조공 관계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오해다. 이 당시 여몽관계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쿠빌라이 칸이 고려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후 일본, 베트남 등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 국가에도 적용시키려 했으나 전쟁에서 패배해 고려가 최초이자 마지막, 유일한 사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비교할 다른 사례가 없어 명확히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나 하나는 분명하다. 고려는 분명 원의 지방이 아닌 원과 별개로 존재하는 한 국가로서 존재했다.

정동행성과 같은 내정간섭 기구를 고려에 설치하는 등 몽골이 고려에 한 간섭은 이전이나 이후 책봉-조공 관계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나친 간섭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책봉-조공 관계가 이뤄졌다는 전제가 있는 한 당시 이뤄진 간섭들은 원이 고려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봐서 행해진 일이 아니다. 책봉-조공 관계 자체가 국가와 국가 간에 맺는 것이다. 그 내용이 중국왕조와 책봉을 받는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려가 원의 일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있다. 강화를 맺은 후인 1269년 고려 서북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원에 투항하는 일이 생겼다. 원이 이를 받아들여 ‘동녕부’라는 통치기구를 설치했으나 고려의 항의에 다시 돌려줬다. 만약 고려가 원의 일부로 완전한 속령이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익주 교수는 “중국식 책봉 관계에 몽골식이 가미된 관계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고려를 몽골의 일부로 보려면 명, 청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조선도 명과 청의 일부로 봐야 한다”고 고려가 원의 일부로 여겨져 원과 같은 색으로 칠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명 교체기의 여몽관계

원과 새로운 관계를 이어나가며 고려는 과거와는 달리 몽골을 문명국으로 인정했다. 이 교수는 “몽골은 남송을 점령한 후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장려했다”며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몽골을 보며 고려인들의 머리에 몽골이 오랑캐가 아니라 중화를 계승한 문명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정도 고려 내 반원 감정을 덮을 수는 없었고 고려조정과 왕실 내에선 빈번히 반원 세력을 배척하고 개혁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세력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들이다. 한족 왕조인 명이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자 고려는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친명 반원 정책을 공고히 했다. 원이 몰락하고 명이 떠오르는 국제정세에 빠르게 대응한 것이다. 여기엔 명이 요동을 점령해 고려와 몽골이 접촉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도 한몫했다.

물론 고려 내 세력들이 모두 철저한 친명 반원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요동 정벌을 추진한 최영은 북쪽으로 밀려난 원과 힘을 합쳐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원에는 그럴 힘이 없었고 요동 정벌 자체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됐다. 고려와 몽골이 뭔가 해볼 수 있던 마지막 기회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이후 세워진 조선은 외교에 있어 명과의 관계에 집중했고, 몽골은 명나라를 상대로 계속 버티며 때로는 우위에 서기도 했으나 후금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글_ 이길훈 기자 greg0306@uos.ac.kr
그림_ 이은정 기자 bbongbbong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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