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은 올해로 102살이 됐다. 그 긴 시간동안 우리대학은 시대와 서울시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해왔다. 경성공립농업고등학교, 서울농업중고등학교, 서울농업대학교, 서울산업대학교 그리고 지금의 서울시립대학교. 그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우리대학의 한 세기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식민지 교육과의 갈등, 경성공립농업학교

우리대학의 모체인 ‘경성공립농업학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1918년 개교했다. 일제는 조선에서 쌀, 면화, 누에고치와 같은 원료를 수탈하기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품종의 쌀과 누에를 한국에 퍼뜨리고 재배방법을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결국 일제는 왕실의 밭이 있던 비옥한 동대문 일대에 농업학교를 세웠다. 경성공립농업학교 교직원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반대로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고, 소수의 일본인도 있었다. 이질적인 구성원 사이 차별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갈등이 극에 달한 사건이 바로 1930년 ‘경성농교생 동맹휴학 사건’이다.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경농 2학년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 시비가 붙었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다툼이 커졌다. 학교는 다툼에 휘말렸던 학생들 중 한국인 학생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경찰 또한 한국인 학생만 불러내 조사했다. 학교와 경찰의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한국인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경농의 한국인 학생은 83명이었고 이 중 56명이 동맹휴학에 참여했다. 학교 측은 동맹휴학 참여자에게 퇴학과 무기정학 처분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국인 학생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우리대학이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을 위해 설립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경농의 한국인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의 불의에 격렬하게 맞서 싸운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 1977년 준공된 배봉관. 당시 중앙도서관으로 사용됐다.
▲ 1983년 준공된 학생회관

해방 이후 혼란 속 서울농업중고등학교

경성공립농업학교는 해방을 맞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46년, 5년제였던 경성공립농업학교는 6년제인 ‘서울공립농업중학교’로 개명됐다. 1951년에는 교육법개정으로 수업연한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개편됐다.

해방 이후 일본인 교직원 모두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교육에 차질이 빚어졌다. 한반도 남부의 최고 통치기관이 된 미군정은 경농교장에 이휘재 교사를 임명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미군정의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잘 대해줬던 다른 교사가 교장이 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학생자치회는 항의의 의미로 교장실 앞에서 통곡을 하거나 상여를 매기도 하고, 이휘재 교장에게 사퇴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교사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북한 인민군이 학교를 점령해 기숙사를 종합훈련소로 만들었다. 일부 학생들은 북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징집돼 전선에 투입됐다. 학교 시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를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 개교 58주년 기념 전농제 댄스파티가 열리고 있다.

‘서울대 농과대학’ 될 뻔한 서울농업대학교

인문숭상의 풍조로 농업중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자 학교는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1950년 초급대학으로 설립된 ‘서울농업대학’은 이후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며 성장했다. 당시 학과는 원예학과, 수의학과, 농공학과, 양잠학과 등이었고 이후 농업경영학과가 신설됐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학교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군사정부는 대학 정비에 나섰고, 서울농업대학은 서울대의 농과대학으로 병합될 뻔 했다.

서울농업대학은 서울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1952년 교육자치제도가 실시됐고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가 구성됐다. 서울농업대학은 대학으로서는 유일하게 교육위원회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됐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서울의 초·중·고등학교에만 집중했다. 따라서 서울농업대학의 발전 속도는 다른 대학에 비해 느렸다. 그 가운데 농업대학을 벗어나 산업대학 혹은 종합대학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됐다.

뜨겁게 학생운동을 전개한 서울산업대학교

1968년 취임한 구재서 학장은 종합대학 승격을 계획했고 당시 서울시 측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해 예산문제로 보류됐다. 이 과정에서 학교 부지를 당시 비싼 땅값을 지불해야 했던 전농동에서 땅값이 싼 강남으로 옮기자는 방안이 나왔다. 그러나 구재서 학장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강남이전은 좌절됐다.

이후 1973년, 양택식 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농업대학을 ‘서울산업대학교’로 개편한다고 발표했다. 학제도 변화와 발전과정을 겪었다. 원예학과는 조경원예학과로 개편되고 잠사학과는 폐과되는 등 농과대학계학과는 축소됐다. 또한 서울시장의 지시에 따라 공학·도시학 관련 학과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신입생들의 예비고사 성적이 전국 대학 중 9위권으로 상승하고 각종 국가고시 합격률 또한 전국대학 중 8위권으로 향상됐다.

산업대학 학생들은 당대 사회에서 학생운동을 뜨겁게 전개해나갔다.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후 시작된 ‘민주화 운동기간’ 동안 전체 학생 중 절반이 넘는 1,000여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역사적인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집회에도 산업대학 학생들은 오전 학내집회를 마친 뒤 참여했다. 학생 700여명은 교문을 막고 있는 경찰을 뚫고 청량리에서 신설동으로 나아갔고, 겹겹이 가로막은 경찰 저지대를 넘어서며 성공적으로 집회에 참여했다.

우리대학 한윤희(조경75) 씨는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청 근처까지 나갔다가 진압 전경들의 최루탄에 밀려 청계천 뒷골목까지 갔다. 그런데 갑자기 백골단(일반 복장의 진압 전경들)이 나타나 곤봉세례를 하는 바람에 등짝을 여러 대 맞고 다시 피했다”며 “죽을힘을 다해 뛰다 보니 신발을 잃어 버려 맨발 상태였다. 다행히 인자한 구멍가게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해진 털신을 얻어 신었다”고 그 당시 기억을 전했다.

▲ 학생회관과 배봉관 사이에 있는 서울시립대학교 학생운동탑. ‘시대와 더불어 민중과 함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드디어 ‘서울시립대학교’가 되다

유신체제가 무너지자 대학 자율화를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우리대학에서도 학원 자율화를 추진하겠다는 학장의 담화문이 발표됐다. 우리대학 성수용(경제84) 씨는 “학원 자율화 조치가 시행돼 시국문제로 제적당했던 학생들의 복학이 허용됐고, 대학 내 사찰경찰들이 철수했다”며 “이외에도 학생을 대표하는 기구인 총학생회가 출범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1980년대 초 일반 종합대학으로 출범하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됐다. 교명 개칭에 관한 논의도 함께 이뤄졌다. 종합대학을 지향하는 전국 유일의 시립대학으로서 산업대학이라는 명칭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산업대학 초기 시절부터 ‘서울시립대학’으로의 교명 개정운동은 계속됐지만 ‘국립, 공립, 사립 등의 명칭은 학교명이 될 수 없다’는 교육법을 이유로 항상 무산돼왔다. 그러나 1981년 계속된 노력 끝에 ‘서울시립’을 고유명사로 해석하자는 우리대학의 논리가 받아들여졌다.

우리대학은 서울시립대학으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종합대학으로 바로 승격이 되진 못했다. 성수용 씨는 “단과대학이라는 이유로 겪게 되는 사회진출의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해 ‘종합대학교 승격’이라는 학내 이슈로 데모를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결국 1987년 학내와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시립대 종합화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등 여러 노력과 정책추진 끝에 우리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서울시립대학으로 새 학기를 맞이한 우리대학은 국어국문학과, 전산통계학과, 산업미술학과 등의 학과를 신설했다. 1982년도에는 학력고사가 실시되며 계열별 모집이었던 입학전형이 다시 과별 모집으로 전환됐다. 또한 학력고사, 내신, 실기 성적을 고려해 체육특기생을 처음 선발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논술고사가 처음 실시됐다.

1995년 김진현 총장의 취임은 우리대학이 도시과학 중심대학으로 개편되는 출발점이었다. 도시과학대학이 신설됨에 따라 건축도시조경학부, 도시사회학과, 도시행정학과 등이 속하게 됐다. 이후 현재까지 우리대학은 도시과학 연구를 특성화하고 관련 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끊임없는 발전의 과정 속에 있다. 이외에도 2003년 이후 ‘서울의 대학에서 세계의 대학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국제화 대학 구축을 위해 힘쓰고 있다.

2020년 현재에도 우리대학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며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일례로 서순탁 총장은 취임 당시 인터뷰에서 우리대학의 4차 산업혁명 대비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앞으로도 우리대학의 시대를 반영한 발전은 계속될 것으로 기대한다.

▷ 참고기사: 100주년 기념 제716호 4~7, 9면

글_ 박은혜 기자 ogdg01@uos.ac.kr
사진_ 서울시립대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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