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를 우리는 허구(fiction), 혹은 공상(fantasy)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는 뭐라고 부를까? 이런 이야기는 팩션(faction)이란 장르로 분류된다. 팩션은 사실이란 뜻의 영단어 fact와 허구라는 뜻의 영단어 fiction이 결합돼 만들어진 용어다. 즉,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한 장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극 드라마나 대체역사소설 역시 팩션의 갈래에 들어간다.

허구와 사실의 절묘한 조화, 사람들을 매혹시키다

팩션에는 익숙한 역사적 이름과 배경에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실제 국내에서 팩션 장르의 인기는 상당히 높다. 드라마 <허준>, <선덕여왕> 등 많은 팩션물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대장금>이나 <주몽>의 경우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2000년대 초 한류 문화를 주도했다. 영화계에서는 <왕의 남자>나 <광해, 왕이 된 남자>, <명량> 등 천만 관객을 돌파한 팩션 영화가 다수 있을 정도다. 팩션물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다빈치의 작품과 예수, 가톨릭 단체 등을 소재로 한 팩션 소설 『다빈치 코드』 는 이후 영화화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었다.

팩션물, 역사를 다양하게 해석하다

팩션물이 높은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한 상상력 자극 등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팩션물만이 가진 인기 비결은 따로 있다.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풀어낸 역사의 알 수 없는 부분, 그리고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오직 팩션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대표적인 사례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그려냈다.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은 망설임 없이 적진에 돌격해 외적을 쓰러뜨리는 철인이나 신 같은 존재가 아니다. 전장을 앞둔 사람의 고뇌와 혈육의 죽음에 대한 심정을 품은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칼의 노래』는 백만부가 넘게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 <황산벌> 역시 작가의 관점과 상상력이 적절히 활용된 사례 중 하나다. <황산벌>은 황산벌 전투를 장군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딱딱하게 다루는 대신에 병사들의 시점에서 본 전쟁 이야기를 담았다. 신라와 백제, 두 국가의 명운을 건 숭고한 전쟁으로 그려져 왔던 황산벌 전투를 병사 거시기의 시점에서 처참하고 탐욕스러운 것으로 그려 놨다. 국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표현돼온 계백의 가족살해 사건을 계백 아내의 입을 빌려 국가와 전쟁에 희생된 한 가족의 비극으로 그려냈다. 이처럼 팩션물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한 재해석과 내용 불어넣기로 많은 인기를 끈다.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킨 작품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출처: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10

팩션, 허구를 사실로 만들다

많은 사랑을 받는 팩션물, 하지만 수용자들이 팩션물을 소비할 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일부 소비자들이 팩션물의 내용을 실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빈치 코드』를 읽은 몇몇 독자들이 작가가 역사적 사실에 가미한 허구를 숨겨졌던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일이 있었다. 팩션물로 인해 작가 개인의 상상력이나 음모론이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국내에도 팩션물에 등장한 허구가 사실의 자리를 대체한 경우가 있다. 소설 『동의보감』과 해당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허준>의 경우 유의태라는 명의를 허준의 스승으로 등장시켰다. 그러나 실제 허준의 스승이나 의학을 배운 과정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일 가능성 역시 없다. 유의태는 실존 인물이 아닌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의태의 모티브가 된 유이태라는 실존인물이 있으나 유이태 역시 허준보다 후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허준의 스승이 될 수 없다. 즉, 소설과 드라마에 등장하는 유의태와 허준 사이의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내용일 뿐이다. 그러나 허준에 관해 다룬 어린이용 도서에 해당 내용이 그대로 실리는 등 대중들에게 팩션물의 허구가 실제 사실로 인식되고 말았다. 이처럼 팩션물에 가미된 상상력은 때론 사실의 영역을 위협한다. 대중이 팩션물에 가미된 허구와 소재가 된 사실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계와 다른 이미지,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키다

팩션물에 묘사된 인물의 모습과 평가 역시 논란이 된다. 후삼국시대의 궁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민가로 도망가 먹을 것을 훔쳐 먹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가 왕건과 자신의 부하들 앞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해 시청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그나마 <태조 왕건>의 경우 해당 연출이 작가의 상상력일 뿐 실제 기록과 다름을 명시해뒀다. 진짜 문제는 그런 설명도 없을 때 발생한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경우 명성황후 민씨(이하 민비)가 일제에 맞서 싸우고 나라의 근대화를 앞당기려했던 존재로 묘사된다. 여기에 더해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도 민비를 긍정적으로 그려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선 영웅적 이미지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학계에서 평가한 민비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우리대학 국사학과 안정준 교수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민비에 대한 ‘미화’는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다”며 “현재 학계에서는 민비와 조선왕실에 관해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한 정국운영으로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했고, 왕실보호에만 치중하느라 봉건적 시스템의 개혁 시기를 놓침으로써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겼던 책임을 더 크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물론 이를 인물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 평가한 부정적인 평가를 극에서 배제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다양한 관점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 『소설 동의보감』 표지, 드라마로도 제작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으나 사람들이 작품 내 설정을 실제 사실로 혼동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출처: 이은성, 『소설 동의보감』, 창작과 비평사, 1990

논란 없는 창작을 위한 노력

위의 사례 외에도 많은 팩션물들이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 <명량>은 실존 인물 배설이 이순신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실제보다 더 부정적으로 묘사됐다는 이유로 후손들에게 법적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제 사건에 관한 문제의식 때문인지 최근의 팩션물은 실제 인물을 등장시키는 대신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영화 <남산의 부장들> 역
시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을 ‘김규평’, ‘박통’ 등 모티브가 된 인물이 드러나는 가상의 인물을 사용해 다뤘다. 옛 시대를 배경으로 활용해 그 매력을 사용하되 가상의 인물로 이야기를 전개해 역사 왜곡 논란, 혹은 실존 인물의 후손들과 부딪히는 일을 피한 것이다. 다만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극 중 일본 극우단체 ‘흑룡회’에 소속된 구동매라는 캐릭터가 친일을 미화한다는 논란에 휩싸였었다. 결국 제작사 측은 구동매 소개에서 흑룡회라는 설정을 제외했다. 가상의 인물이라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학문과 창작은 구분돼야

그럼 논란을 피하기 위해 팩션물은 작가의 상상력을 배제하고 오직 사실만을 담아야할까? 그렇지는 않다. 팩션물은 창작물이지 다큐멘터리나 학계의 연구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정준 교수는 “창작과 학문은 구분돼야한다”면서도 “‘사실’이라는 잣대로 ‘창작’을 억누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팩션물이 창작물일 뿐 실제 역사가 아님만 분명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창작자의 상상력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되 역사적 사실을 확실히 고증하고 상상력과 실제 역사와 구분되도록 한다면 팩션물은 앞으로도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길훈 기자 greg0306@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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