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를 이른바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회색구름이라 이야기 한다.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시작된 80년대 시대상황은 그야말로 억압과 독재의 암울한 세월이었고, 이에 젊은이들은 꽃같은 생명을 던지며 온몸으로 자유를 갈구했으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험한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속에 현재의 최동민(법학88) ‘전국 공공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꿈나무란 이름의 새내기로 입학한 후 통일함성 동아리 활동과 농활, 각종 집회참여로 바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89년 이철규 사인 규명 시위에 참가하여 광주교도소에서 5개월 동안 복역하게 된다. 옥중에서 과대표로 선출되어 대학교로 돌아온 뒤에도 역시나 남북교류사업, 농활 등의 사업에 참여했다. 4학년 때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서총련, 동총련의 조국통일대행으로 통일사업 투쟁을 펼치다가 구속되어 성동구치소에 1년간 수감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학졸업 후 경실련에 입사하여 지방자치업무를 하다 내부문제로 그만두고, 국토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몇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사회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회보험 등의 업무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노동조합을 만들게 되고, 노동쟁의와 각종 교육활동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라며 최동민 동문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웃으며 이야기했다.

뚜벅뚜벅 강인한 의지로 전진해온 그는 한국노총 산하 공공3연맹(공공건설노련, 공공서비스연맹, 정부투자기관노련) 통합작업을 완성하여 현재 공공노련의 정책실장을 맡고 있다. “공공3개 연맹 통합작업은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조직력과 교섭력, 대표성의 확보와 정책역량의 강화를 위한 조직수준의 발전을 모색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라며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된 일이였다고 한다.

또한 농협중앙회 비정규직사업장을 만들어 노동기본권을 확보하여 비정규직의 조직화를 이루어냈다. 최동민 동문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노동자들이 점진적으로 노동자 의식을 갖고 참여를 통해 노동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일에 대한 자긍심이 생깁니다” 라고 소감을 말했다.

앞으로 최동민 동문은 장애인, 노령자, 실업자, 이주노동자 등 사회 소외계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남겠다고 한다.

“후배들은 대학생활 동안 다양한 독서와 동기, 선배, 교수님들과의 토론 등으로 정의가 무엇인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자원봉사활동과 농활참여로 삶의 현장속에서 인간들의 보편적 생활을 느껴보길 바랍니다” 라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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