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것이 어른 침팬지를 죽이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쁠 것이 없다.’ ‘임신중인 태아를 낙태하는 것과 갓 태어난 신생아를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인간의 생명이 존엄하다는 생각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러한 주장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거부감은 합리적인 비판의 결과이기보다는 우리의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감정에 그 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논리적으로 옳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 ‘히틀러의 망령’.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자신의 여러 책들 속에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피터 싱어(Peter Singer)를 지칭한다. 자신의 책 『실천윤리학』(Practical Ethics), 『Rethinking Life and Death』(미 번역),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등에서 일관적인 논리로 우리의 구시대적인 생명관을 전복시키는 그는 확실히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세상을 가장 시끄럽게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실천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개념이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존중 사상은 기독교적인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서 정당화되기가 힘든 개념이다. 그는 이처럼 종(種)이기주의적인 바탕에서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 윤리적인 왜곡을 바로잡고, 우리의 윤리적인 고려의 대상을 인간에서 동물에게까지 확장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의 논의가 일상인의 도덕적인 감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그의 논의를 더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나쁘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당신도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피터 싱어가 쳐놓은 논리적인 덫에 걸려들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인 이상 당신은, 당신이 최소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그의 논리에서 빠져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모든 동물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또한 논리를 확장시키면, 아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8주된 태아를 낙태하는 것보다 어른 원숭이를 죽이는 것이 더 나쁘다. 현대인이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며, 그 대표적인 형태가 동물 실험과 육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 실험을 중단하고 채식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의식이 있는 모든 존재를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을 제안하면서, 그 동안 우리사회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왔던 의식적인 존재들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지목하는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들은 동물과 여성이다. 실제로 그는 그의 책에서 일반인을 통칭하는 ‘그’(he) 그리고 ‘그/그녀’(he/she)라는 대명사를 쓰지 않는다. 대신 그 동안 차별 받아온 여성들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그녀’(she)라고 쓰자고 제안한다. 또한 ‘동물’(animals)이라는 표현을 ‘인간 아닌 동물’(nonhuman animals)이라고 쓴다.

1999년 피터 싱어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의 심각한 시위가 있었으며 그 대학에 장학금을 기부하던 한 단체는 장학금을 끊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망령이라고 그를 매도했으며 합리적인 토론의 장인 대학들마저도 그의 강의를 취소해버리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짧은 지면을 통해서 그의 논지를 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주장의 논리적인 오류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논리적으로 옳다면 실제적으로도 옳지 않을까? 당신이 그의 논리에 설득 당하고 싶거나, 그의 주장을 논파하고 싶다면 지금 그의 책을 통해서 그를 만나 보기를 권하고 싶다.

박종준 (서울시립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3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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