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러시아 말로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을 가진 도시 블라디보스톡행 비행기에 30명의 해외봉사대원과 함께 몸을 실었다. 우리들 귀에는 해삼위(海參威)가 더 익숙한 곳,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해 그토록 러시아가 얻고 싶어 했던 극동의 부동항이 바로 그 곳이었다.

역사만큼이나 긴 여정이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두 시간만에 도착한 공항은 미국과 대결했던 거대한 소련제국의 극동함대의 총본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도시의 조그마한 공항이었다. 입국수속만 두 시간여. 이러한 체제의 국가가 50년 가까이 미국에 필적할 유일한 강국이었다니. 오히려 미국이 위기를 이용하여 냉전을 유지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견해에 고개가 끄떡여지는 부분이다.

올해의 해외봉사활동 장소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버스로 세 시간정도 걸리는 빠르치잔스크로 정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이들이 돌아와 정착하고 있는 빠르치잔스크는 이름 그대로 항쟁과 투쟁의 혼이 깃든 곳이다. 인구 5만명 중에서 5천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는 이곳을 해외봉사활동의 장소로 정한 것은 “호미가 없어서 손으로 밭을 간다”는 고려인의 고달픈 삶과 지척에 고국을 두고서도 눈물만 흘리며 그리움을 가숨에 품고 살고 있는 이들의 사연을 듣고 나서였다.


고국을 앞에 두고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는 고려인들

고려인들의 대부분은 도시 변두리의 한적한 곳에 살고 있었다. 1960년대의 골목길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마다 텃밭을 직접 가꾸어 자급자족하는 동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멀었다. 30명의 대원들은 조장의 지시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주인집 담장고치기, 도랑치기, 도로보수 등은 약과였다.

번듯한 마을회관 하나 구입하는 것이 교민들의 숙원사업이었지만 우리 돈으로 1천만원의 회관 구입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중국사람에게 팔려버렸다는 얘기를 들은 우리들은 가슴속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겨우 시에서 마련해준 옛학교 건물. 페인트칠에서부터 가져간 컴퓨터를 설치할 책상과 걸상을 설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가져간 중고 컴퓨터들은 기약 없는 전기설치공사를 기다려야만 할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지공예와 태권도 교실은 어린이들의 대환영을 받았고 수지침은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명의의 치료를 받으려는 러시아 현지인들이 합세하는 바람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였다. 이북사투리도 아니고 우리의 사투리도 아닌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분명 우리말이었다. 조국, 고향, 민족...한 마디 한 마디가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이어온 동질성을 확인해 주는 단어들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단원들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남을 돕는 즐거움과 도울 수 있다는 기쁨이 서른 명의 젊은이들을 또 다시 봉사활동 현장으로 나가게 했다. 가슴으로 느끼는 동포애가 아니었던들 이들은 이미 쓰러졌을 지도 몰랐다.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한 달 이상이 걸려 도착한 동토의 중앙아시아에서 가져간 벼와 콩, 보리와 밀을 심어 농사를 지었다. 특유의 근면함과 끈기가 카레이스키들에게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었다. 구소련의 해체는 이들에게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중앙아시아에 부는 새로운 민족주의는 고려인을 러시아말을 쓰는 이교도였을 뿐이다. 박해와 핍박은 한 세기가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라이사 안. 안중근 의사 형님의 손녀딸이시다. 67세인데도 젊게 보이시는 조그마한 체구의 아담한 할머니셨다. 그러나 눈동자와 말투는 독립투사의 후손답게 빛나고 사람을 경건하게 만든다. 무엇을 도와드릴까? 아니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을까? 이 쓰러져 가는 집을 새로 사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 뒤 텃밭을 새로 일구어 드릴 수도 없는 일. 겨우 생각해 낸 것은 거실의 천장을 새로 칠하고 벽지를 새로 발라드리는 일로 정했다.

그 분들이 원한 것이기도 했지만 우리 눈에 비친 빛바랜 벽지는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새롭게 단장될 수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했다. 미장공 자격증을 가진 전배호 군의 경력이 빛을 발했다. 할머니가 손수 골라 오신 보라색 벽지 한 장 한 장에 자신들의 정성도 벽지와 함게 남아있으리라 생각한 학생들의 미소와 웃음은 순수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내생애 가장 값진 것을 본 날이었으리라.


러시아 사회에서 성장하고 있는 고려인 3세들

나를 포함한 지도교수와 조교가 묵고 있는 집은 반찬공장을 직접 운영하는 슬라바 박 선생의 집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고려인들의 이름은 모두 러시아 식이다. 제냐 리, 안드레이 홍, 블라디미르 한....슬라바씨는 고려인 2세지만 오랫동안 우리말을 쓰지 않아서인지 서투르다면서도 우리말을 하는 우리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허기사 아들 딸 모두 우리말을 잊어버린 세대인데다 러시아 사위, 러시아 며느리를 맞아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오죽이나 반가왔으랴.

그는 우리가 가져 온 한국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우리가 가져간 농협김치를 맛보고는 자신이 만들어 팔고 있는 김치는 김치가 아니라면서 맛을 극찬했다. 물론 가져간 김치를 샘플로 해서 만들어 파시라고 드리고 오기도 했지만.

슬라바씨는 대부분의 고려인들과는 달리 사실 소련의 해체로 덕을 본 사람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좀 일찍 연해주로 돌아온 그는 5천명의 고려인들뿐 아니라 고려인들과 현지인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반찬과 만두, 그리고 케익 등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고 성실성에다 사업수완은 한달에 1만달러를 벌도록 해주었다.

이십년이 채 못된 고려인 사회가 구심점을 잃고 한 갓 나약한 소수민족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를 고려인협회 부회장직을 맡게 했고 회장인 블라디미르 한은 차기 빠르치잔스크 시장 출마를 위해 표밭을 가꾸고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가 당선되기만 하면 고려인의 위상뿐만 아니라 생활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빠르치잔스크의 밤은 열시가 넘어야 거뭇거뭇해진다.

동행취재를 위해 함께온 SBS 방송팀은 조금이라도 더 감동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야한다면서 밤낮을 뛰어다니고 있고 학생들은 일 초라도 더 카메라에 담기기를 바랬고, 인터뷰라도 제의를 받는 날이면 더듬거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화면에 어떻게 비칠까를 궁금해했다. 기뻐하는 천진한 모습이 나를 7년째 해외체험과 봉사활동을 지속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버스에 오르는 대원들의 입에서 풍기는 보드카의 향기가 점점 짙어가고 있다. 벌써 갈 때가 가까워진다는 징조이리라.

이제 내일이면 떠나는 날이다. 예년에 해왔듯이 마지막날은 꼭 마을잔치를 준비한다. 학생들이 서울에서 가져온 음식재료와 인근 나홋트카 시장에서 사온 반찬들을 이용해 100여명분의 음식을 준비한다.

중국 연길 인근의 해란촌, 몽골의 유목민 마을에서 했던 마을잔치에서 한국의 정취를 맛 보여주는 것. 이 것도 작지 않은 기쁨과 보람이다. 지지고 볶는 기름냄새와 코끝을 자극하는 낯익은 음식내음이 29번 학교 교정에 가득하다. 처음 먹어본다는 김밥과 이름도 모른다는 김치전...이 음식들이 아련하게 잊혀진 조국의 맛을 생각나게 해 줄 것이리라.

“영정사진을 일찍 찍어드리면 더 오래 사신답니다”

영정사진 촬영. 기실 이 곳에 온 목적은 바로 이승을 뜰 적에 붙여놓을 영정사진은 커녕 벽에 걸어 둘만한 번듯한 사진 한 장 없는 이들에게 우리가 가져간 컬러프린터로 인쇄해 드리는 것이었다. 가져간 아릿다운 치마와 저고리, 두루마기로 맘껏 멋을 내고 카메라 앞에 서신 이들은 바로 부모요, 아저씨 아주머니이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셨다.

긴장해 굳어진 표정을 펴기위해 온갖 재롱피우는 학생들이 바로 이들의 아들 딸이자 손주들이었으니까. 고려옷을 처음 입어 본다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가까운 조국이 얼마나 멀리, 그리고 오래전의 일이었던가 코끝을 시리게 한다. 멀리 카자흐스탄에 가져가 노인정의 할머니들에게 입혀서 생애 마지막 사진을 찍고 싶다는 할머니에게 한 벌을 드렸다.

한 벌의 치마 저고리지만 진정한 고려인임을 느끼게 해 줄 수있음을 진작에 알았더라면...후회가 아니라 회한이 가슴을 친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잡으려고 수 십번의 셔터를 눌러대던 전문가 뺨치는 맹주영군. “영정사진을 일찍 찍어드리면 더 오래 사신답니다”라는 그의 말에 새삼 봉사단의 연륜이 더 해감을 느낀다.

이제는 떠나야 하나? 항상 이별은 아쉬운 법이다. 중국과 몽골에서도 그래왔듯이 떠날 때는 언제나 가슴과 발길이 무겁다. 특히나 피를 나눈 동포들이 함께 부르는 아리랑은 더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꼭 다시 오라고들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꼭 오겠노라고 쉽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만다. 설사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우리와 그들이 교감했던 것들은 단지 동포애나 정성만이 아니다. 아쉬움과 그리움이다.

함께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갈라져 남남이 되어버렸고, 다시 쉽게 만나지 못하게 된 아쉬움과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이다. 가난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시대적 상황이 그들과 우리들의 운명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언젠가는 우리를 다시 한 번 그 곳을 찾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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