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은 한 수필에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 가운데 하나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든 적이 있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들어 보면 전혜린의 그러한 평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저절로 든다. 장엄한 도입부에서부터 격정적인 피날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 곡은 듣는 이의 혼을 드높은 정신의 경지로 이끌어 올리면서 전율과도 같은 감동의 물결에 흠뻑 젖어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교향곡 5번 이외에도 쇼스타코비치는 숱한 걸작을 남겼다. 수많은 교향곡과 현악 4중주, 그리고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칸타타, 거기다 재즈 작품들까지……. 이런 작품들로 하여 그는 근대 서양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의 반열 속에 뚜렷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는 그의 생애는 과연 어떠했던가?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그 자신의 창조적인 광채로 빛나는 예술혼과 공산주의 독재 국가의 잔인무도한 권력이 행하는 억압 사이에서 빚어지는 숨막히는 긴장으로 허덕이며, 마치 한 사람의 슬픈 줄타기 광대와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수천만 명의 동포가 잔인무도한 숙청의 제물이 되어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산 나라를 지배한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권력은 한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피의 홍수를 몰아오곤 했다.

이런 나라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을 했다. 그 자신도 늘 한밤중에 느닷없이 체포되는 운명을 각오하면서 살아야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 몇 번이나 구체적인 위기가 닥쳐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워낙 전세계적으로 드높았던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행운, 그리고 그가 종종 어쩔 수 없이 벌였던 광대짓이, 그의 이름을 처형대의 제물로 사라진 사람들의 명단에 들지 않을 수 있게 했다.

이런 나라에서 살았기에 쇼스타코비치는 버나드 쇼라든가 로멩 롤랑 같은 사람을 가장 경멸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서방 세계에 살면서 그 세계가 허용해 주는 안락한 삶을 마음껏 향유하는 한편으로, 허황한 관념적 환상에 취한 나머지 소련을 동경하고 찬양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소련에서 잔인무도한 인권 유린이 광범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가 알려진 적이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알려졌지만 그들이 간단히 무시해 버렸던 것일 따름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그처럼 엄혹한 상황 속에서 나온 것들답게, 늘 어두운 긴장과 짙은 고뇌의 그림자를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어떤 불안도, 공포도 그의 음악이 위대한 예술의 품격과 높이를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 자체를 방해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올해 9월 25일은 바로 이러한 사연의 주인공인 쇼스타코비치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꼭 1백 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전후하여, 쇼스타코비치를 기념하는 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게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작품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뛰어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어떤 폭압적 권력의 미친 칼춤에 의해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예술의 존엄성을 증명한 것이기도 하기에, 그의 탄생 1백 주년은 참으로 소중하게 기념될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