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서기 2000년이고 우리 식으로 단기 4333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각 문화마다 서로 다른 력(歷)이 있어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새 천년의 의미는 소위 20세기의 국제적 패권관계가 파생한 시간개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B.C와 A.D로 명명되는 시대구분에 익숙해져 과거를 기술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서구역사 기술(記述)의 방법론에 익숙해져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2000년’의 벽두에도 우리 나라의 각 방송사는 ‘새 천년’을 맞이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갖가지 표정이라는 주제로 인종과 문화의 간극을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하는 갈등과 차별을 희석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것이 진정 세계화가 배태하는 유토피아의 일면일 수 있으나 인류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여기에 대한 진지한 해석과 반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반쪽만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그쳤다는 평가 역시 가능하다.

실상 20세기 말의 몇 가지 사건들, 가령 현실 사회주의라든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온갖 파괴와 살상이 자행되었던 지난 한 세기의 우울을 걷어내는 데 일조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나치즘의 대중심리를 분석하면서 현대 인류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파시즘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권위주의 체제의 급격한 몰락과 냉전의식의 종말은 인류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자성(自省)능력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백년을 두고 보았을 때 이러한 이성의 힘은 한 시대의 끝자락에 놓여 미세한 빛을 발했을 뿐 20세기 대부분의 시간동안에 인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극단적인 우를 범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양차 대전을 기점으로 아우슈비츠, 스페인 내전, 베트남전, 최근의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표면상 정의와 합리를 내걸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맹목적인 이념과 이해관계의 사슬에 걸려 벌어졌던 인간사냥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소위 제 3세계라 일컬어졌던 약소국 집단들의 독립투쟁과정과 이들을 자신의 이념블록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강대국들이 벌였던 은밀한 첩보정치의 내막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실종과 박해, 차별의 내막들은 현재까지도 온전히 그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역사를 새 밀레니엄의 출발이라는 구호 아래로 소급시키는 행위는 세계화라는 구호의 이상에는 걸맞을지언정 A.D와 B.C의 역사로 편입될 수 없는 유교와 불교와 이슬람과 남미의 현실에서는 언제나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문화와 이념과 인종의 차이가 약육강식의 조건으로 작용했던 지난 세기를 되돌아 보았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새해 벽두의 화려한 밀레니엄 쇼를 진정 편안한 마음으로 즐겼을 지구인이 몇이나 되었을 지에 대해 우리는 자못 심각한 태도로 반추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인류가 고대하는 ‘21세기’의 진실한 자화상은 세계화가 천명하듯이 막무가내로 갈등이 봉합된 하나의 세상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을 도모하는 지역중심의 사회일 수도 있다. 그것은 각 문화마다 서로 다른 시간개념이 존재하듯이 상이한 역사와 의식을 기반으로 해야 할 것이며 어느 일방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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