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마창노련’ 그 옛 자취를 찾아

우리 나라 노동운동의 역사는 해방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시대 농민 중심의 소작쟁의 투쟁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남·북을 포함하는 최초의 민주노조 연맹이라 할 수 있는 전협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남한 내에서 전협은 북과 이어지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탄압 받은 이후 사실상 해체되게 된다.
이후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와 개발독재로 이어지는 과정은 노동운동의 깊은 침체기였다. 그러나 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노동운동의 불이 지펴지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은 노동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87년 6월 항쟁은 각 사업체별로 민주노조 설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한편 이 시기부터 각 사업체의 민주노조 단위들은 노동조합 연맹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각 지방별 노동조합연맹을 결성하고, 나중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노동조합을 설립한다.

그 중 가장 먼저 결성되어 민주노조 운동을 주도하던 노조연맹은 마산·창원 노동조합 총연합(마창노련)이었다. - 편집자주



마산과 창원. 국토 남단의 주요 핵심 중공업 공단이 위치해 있는 이곳에 가려면 서울에서 기차로 장장 5시간을 달려야 한다. 우리가 도착한 때는 이미 늦은 오후의 햇빛이 길게 비추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은 우리 나라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조직으로 꼽히는 마창노련(마산·창원 지역협의회)의 옛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현재 해체된 마창노련의 후신인 민주노총에서부터 옛 마창노련의 자취를 찾기로 했다.

마창노련 - 한국 노동운동의 작은 역사

창원에 있는 민주노총 마창지회로 가는 도중 창원대로를 통과하게 된다. 폭 10차선의 곧게 뻗은 이 도로는 마산 창원지역 경제발전의 상징이자 유사시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길다고 한다. 70년에 마산이 수출입자유지역으로 설정되고, 74년 창원 기계공업단지가 건설되면서 이 일대는 공업도시로서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발전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창원대로의 양옆에는 수많은 공장들과 바둑판같은 진입로가 있어 마창지역이 한눈에 보아도 계획도시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창원대로는 87년 마창노련 결성이후 몇 번인가 노동자와 경찰로 꽉 매꾸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구경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이 도로에서 노동자들은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 그리고 백골단의 전기봉에 몸으로 맞선 것이다. 노동자의 한이 이 도로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어느덧 우리의 목적지인 민주노총 마창지회에 도착하게 되었다. 지회의 실무자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과거 마창노련의 사무국장을 지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허재우 사무국장, 그는 현재 민주노총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악수하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거칠음은 순탄치 않았던 그의 인생에 수여된 훈장처럼 생각되었다.

구 마창노련 시절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는 기자에게 “그 시절을 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할 만큼 당시 상황은 힘들었다고 한다.

투쟁으로 일군 민주노조

마창노련은 특정 지역에 속한 노동조합의 연합체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한 지역의 노동단체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역노조를 결성했고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이 단체를 조명하는 일은 오히려 전국단위의 노동운동을 평가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판단하였다.

87년은 우리 나라 노동운동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해이다. 87년 4·13 호헌 조치 발표 이후 6·10 대회가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인내의 한계를 느낀 노동자들이 급기야 투쟁의 대오를 조직한 것이다. 정부와 회사는 경찰력의 투입과 직장폐쇄 및 집단 해고로 맞섰지만 하나로 모아진 노동자의 힘을 꺽을 수는 없었다.

마산·창원 지역의 87년 임금인상폭은 18∼26%까지 크게 상승했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로 이루어낸 값진 승리였다. 이해 12월 전국최초의 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 마창노련이 결성되었다.

“유인물 한장 뿌릴 수 없었던” 87년 이전

87년 이전 노동운동의 상황에 대한 허재우 씨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유인물 한 장 뿌릴 수 없었다.” 당시에 노동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해고를 감수하는 일이었다. 89년도와 91년 초까지 마창노련의 연대 투쟁은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고용주 측은 87년 이후 구사대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노조에 폭력으로 맞섰다. 구사대는 노조 사무실을 급습하여 노조활동을 파괴하는 일을 전담했던 전문 용역깡패들이었다. 한편 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어 노동운동의 전국적 조직화가 진행된다. 친정부 성향을 띤 한국노총에 실망을 느낀 지역 노동조합협의회가 새로운 대안으로서 전노협을 결성하고 나선 것이다.

민주노총의 밀알로 남은 마창노련

취재 둘째날 마창지회의 안내로 효성중공업노조를 방문할 수 있었다. 효성중공업노조 취재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나긴 노동운동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단체협약과정에서 노조와 사측은 심하게 갈등하고 있었고 노조는 12월 7일 이후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었다. 회사측 관계자는 우리들의 사진촬영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한 노조원은 “회사측이 원래 대학생들의 접근을 싫어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노조원들은 “경기는 좋아졌지만 실질적인 노동자의 삶은 오히려 IMF 이전 보다 더 심각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처럼 마창노련의 굴곡 많은 역사를 뒤로 하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서민적인 고민을 하는 소박한 민중들이었다. 이들의 삶에 마창노련의 해체는 어떤 의미였을까.

‘발전적인 해체’. 이 글귀는 95년 마창노련이 해산하고 민주노총으로 개편될 때 ‘해체 결의문’에 씌였던 말이다. 지방노조 중심의 시대가 가고 노동자들이 전국단위로 단결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수많은 탄압 속에서도 끝없이 노동의 권리를 주장해온 마창노련의 ‘소박한’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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