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론의 이론적 접근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비판적 사회과학계는 논쟁 지형의 급격한 변동에 휩싸인다. 앞으로의 사회운동은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시민사회론의 대두가 그것이다. 이후 조금씩 그늘에서 성장하던 시민운동은 국민정부 출범과 함께 큰 가속도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여러 일간지들에 연재되었던 NGO 관련 기사를 보면 언제 그렇게 한국에 시민단체들이 많았는지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60년대 후반 시민사회의 대두 배경

서구에서는 이미 60년대 후반에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가 비롯되었는데, 당시 서구 학계가 시민사회에 주목하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20세기 들어 증대된 국가주의적 경향이다. 서구 유럽에서의 전반적인 국가관료제의 비대화 현상, 심지어는 파시즘이라는 극단적 전체주의 체제의 비극적 체험, 그리고 동구 유럽에서의 스탈린주의적인 전횡 등은 이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국가주의적 경향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그리고 시민 세력을 강화함으로써 국가권력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찾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다원화이다. 현대사회에는 경제적 착취 이외에 환경파괴, 여성, 인종차별 등을 통해 문제가 다원화되고 있고, 이에 따라 사회운동도 다원화 내지 부문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주의와 결별한 체제내부개혁의 시민운동

90년대에 들어 동구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 한국 경제의 외형적 성장, 문민정부의 등장 등의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민중주의적 사회변혁을 지향하던 한국의 진보진영 내에 동요가 일게 되고 이 동요의 와중에서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가 비판적 사회과학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국에서 시민사회론을 바라보는 입장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체적으로 80년대의 민중주의와 결별하여, 체제내부적 개혁을 지향하는 온건한 시민운동의 방향으로 정리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 및 사회의 민주화, 현대사회 내에서의 문제의 다원화와 이에 따른 운동의 다원적 확대란 시민사회론이 견지하고 있는 두 원칙은 그 자체로서는 분명히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특히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는 현존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서 민중운동에 시사하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한번 잘못 고착화된 사회내부의 정치권력적 관계를 다시 고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구소련과 동부 유럽에서 수립된 당과 국가 중심의 관료주의 체제는 어떠한 변화와 개혁도 완강히 거부했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현존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사회 진보 운동도 반드시 사회의 민주주의적 기초를 확대시키는 정치제도화와 병행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시민사회에서 소외된 시민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에서 짚어보아야 할 맹점은 ‘시민’ 개념이 과연 누가 시민인지 그 경계를 분명히 할 수 없을 정도로 막연한 개념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한편으로 시민운동 단체들의 집회에 사회내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지도자가 내빈으로 참석하여 기념연설을 하는 장면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지 의문스럽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내의 일부 계층의 실질적인 시민의 권리를 갖지 못한 채 소외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이는 결국 시민을 배제한 시민사회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는 국가 권력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의 막연한 시민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체제론적인 분석과의 결합속에서 시민의 개념을 더 명확히 해야만 생산적인 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민중개념과의 결합 없이 시민개념은 불완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민주화 고려 없는 수용은 위험

서구 시민사회론을 수용하는 데에도 자칫 이것이 서구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범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서구의 시민사회론은 여러면에서 유럽 중심주의의에 한계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는 제 3세계를 향해 가장 선진적인 사회제도를 따라올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 서구와 제 3세계 사이의 관계의 민주화에 대한 고려없이 시민사회론은 논리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
끝으로 시민사회론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데에서도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역사적으로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란 오랜 전통 속에서 지내왔던 한국사회는 당연히 시민사회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다.

또한 시민운동단체들은 많이 생겨났지만, 아직도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시민의 층은 매우 얇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운동단체들은 집권 세력의 정치적 외곽지원 단체나 아니면 개별적인 수혈대상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적잖게 우려된다. 이러한 것들을 경계하고 국가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으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을 견지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 시민운동이 넘어서야 할 최소한의 관문이 될 것이다.

이성백
(철학·사회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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