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 문학을 읽는다

왜 하필 ‘신세대’ 문학이었고, 도대체 무엇이 신세대 ‘문학’이란 유령과의 싸움을 지속시켰던 것일까? 이념의 열기가 식어버린, 진보적 기획의 유효성이 폐기되어버린 90년대의 문학계에 말이다. 키워드는 환멸과 쾌락이다. 흔히 난파된 현실에 대한 환멸의식은 낯선 욕망에 대한 쾌락의지로 변형된다.
90년대의 문학공간에서 소위 ‘신세대 문학’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였다면, 그것은 문학 외적인 변화와 문학 내적인 변화가 맞물린 데서 나타난 결과이다. 문학 외적인 변화로서의 현실 역사의 급격한 변모과정에 대해서야 그간 숱한 진단이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의 논의를 생략하기로 하자(가령,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역사를 상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문학 내적인 변화는? 이른바 ‘민족(민중)문학론’에 입각한 창작방법론 및 작품들의 현실적 유효성이 상당 부분 효력 상실되는 결과를 노출시켰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문학 공간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어졌던 ‘김영현 논쟁’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공명하면서, 우리 문학계의 ‘시선변경’을 의식적으로 가속화시켰다. 계몽적 기획으로서의 문학의식이 약화된 자리에, 유희와 욕망의 자기표현으로서의 문학정신이 만발했다. 모든 이성적 기획은 관념의 만능성에 집착한 나머지, 일상적인 삶의 ‘미세한 결’을 포착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당시의 젊은 작가와 비평가들의 충고였다.

그러나 문학적 신세대, 혹은 신세대 문학의 경계구획은 여전히 모호하다. 당대적 상황에서 윤대녕, 신경숙, 장정일, 이순원, 박상우, 구효서, 이인화, 박일문, 주인석을 포함한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태어난 젊은 작가들은 자주 신세대 작가군으로 분류되었다. 문제는 이들의 소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경향성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른바 신세대 작가군에 포섭되는 것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왜 그랬을까? 신세대 문학에 드리워진 경박성과 유희 지향성, 환멸의 허무주의, 몰개성적 쾌락주의에 대한 평단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문학계의 신세대 개념과는 별도로 대중문화지형에서의 신세대 개념이 따로 놀았다는 사실이다. 가령 대중문화지형에서의 신세대 개념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로부터 규정된다. 미메시스 그룹이 펴낸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신세대’는 문학계의 이른바 신세대를 가장한 386세대와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여기서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문학적 신세대는 문화적 구세대였고, 문화적 신세대는 문학적 신세대에게 타기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9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니까 소위 ‘신세대 문학’이라는 개념구획을 통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평단의 경계구획은 매력적이기는 하되, 혼란만을 가중시켰던 실패한 명명법이었다. 그것은 연령개념도, 문화적 이념형에 입각한 개념규정도 아닌, 지나치게 모호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선정적인 ‘안개지대의 언어’였다.
그러므로 지금 신세대 문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되, 그 작업의 실효성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헛고생’일 확률이 높다. 때문에 나로서는 이러한 자동적이며 기계적인 작업 대신, 나 자신이 바라마지 않는 희망에 대해서 간략히 피력하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시대의 문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고민을 제도론적인 변화를 고려하면서 정립할 필요가 있다(문학이 소외된 시대에 문학하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특정한 이념에의 편향을 한 시대의 ‘문학적 정전’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성에 반항하자(자의식 없는 문학적 ‘토픽’에의 집중 대신, 자기 고민을 보편화하려는 진정성의 태도를 보여주자). 셋째, 문학창작의 동력으로서의 세대론적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시대사적 과제와 연동시켜 파악하는 정신의 유연성을 견지하자(문학적 자기의식과 현실인식을 상생적으로 교류시키자).

한 시대의 문학적 경향성은 연역적인 논리가 아니라, 귀납적인 추론의 종합으로부터 비롯된다. 『데미안』의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첫 탄생은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두 번째 탄생은 의식적인 것이다. 만일 ‘신세대 문학’이란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 두 번째 탄생을 기다려야 될 것 같다.

이명원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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