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프리즘

역병 같은 지역주의가 도지고 있다. 정당명부제, 선거법 개정, 투명한 공천이 모두 물 건너가 전국은 지역병의 숙주가 번식하는 데 아주 좋은 옥토가 돼 버렸다. 민국당이 경상도를 근거지로 깃발을 꽂아 서곡을 울리자, 자민련이 민주당의 반칙에 반기를 들고 공조파기를 선언하며 충청도에 진을 쳤다. 민주당 마저 이미 확보된 텃밭 전라도를 중심으로 세 확장에 나서 3김의 이전투구가 시작된 듯 하다.

최근에 발간된 하랄트 뮐러의 <문명의 공존>에서는 이러한 지역주의가 지배계급의 논리에 다름 아니라고 일갈했다. 문명의 충돌은 세계를 지역구도로 분할하려는 미국적 사고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타겟으로 한 뮐러의 반격은 사뭇 논리적이고 강하다. 헌팅턴은 냉전이 무너진 후 이제 자유주의의 독주만이 남았다는 후쿠야마의 주장을 거부하고 이슬람교의 부흥을 근거로 서구와 비서구의 대립구도가 신냉전시대를 열 것이라고 전망했다. 충돌보다는 공존이 좋고 그렇게 가야 하기에 뮐러의 손을 들어주고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돌이냐 공존이냐를 논하는 이들의 철도같은 논리 대결을 따라가다 보면 우연찮게 만나는 지점을 발견한다. 충돌과 공존을 좌우하는 주체는 ‘서구’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충돌을 조장하고 무력으로 다시 공존을 부르짖는 미국과 EU의 행태를 우리는 최근에도 수차례 보았다. 정치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지역이나 이념, 종교라는 미명아래 돌파구를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서구였으며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무력도발을 용인하고 때론 스스로 초토화에 나섰던 것도 그들이었다. 결국 문명의 충돌이든 공존이든 서구가 막거나 조화를 시켜줘야 한다는 대안은 아시아나 제3국을 여전히 종속적 들러리로 인식하는 한계를 드러낸 꼴이다. 패권국가들의 자기논리 이상이 아니다.

우리의 지역구도도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지역주의가 지역주민들의 정서와 무관하게 지배계급의 정치적 이해의 산물이라는 주장과 상통해 보인다. 실제로 미디어와 정보통신으로 인해 그리고 상호교류의 확대로 당사자들의 지역감정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정치인들은 이를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눈치다. 전라도와 경상도, 경상도와 충청도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도 결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의 연장이라는 불손한 의도가 짙게 배어 있다. 지난 2일 ‘정운영의 100분 토론’에서 각 당 수뇌부들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지역주의를 해야겠다는 어불성설로 지역주의에 대한 애착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지역주의 극복은 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과제다. 뮐러는 지난 3일 KBS와의 대담에서 “문명의 충돌은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인간이 극복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일본의 진보적 학자 6인이 펴낸 <기억과 망각>에서 하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책임 추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전후극복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있다는 것을 독일과 비교하여 강조한다.

자신의 과거사를 ‘망각’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이 지역주의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철저한 ‘기억’ 되살리기와 자기 반성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 오로지 영악한 정치력으로 정치적 야심만 키우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절차가 생략되고는 지역주의 극복은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시민단체의 혁명적 운동과 유권자들의 심판으로 철저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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