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 그사건 지금은 - 전농 3동 철거민의 근황을 찾아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은 정부의 무책임한 재개발 정책 때문입니다.”

전국철거민연합에 전화를 했다. 우리 대학에서도 다수의 학생들이 참가했었던 전농 3동 철거민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받은 이는 현 전농 3동 철거민대책위원회 정향숙 연사부장이었다. 그는 현재 전국철거민연합에서 활동 중이다. 정향숙 연사부장 뿐만 아니라 현재 가수용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6가구의 모든 주부들이 전국철거민연합에서 활동 중이다.

도심지 재개발 사업에 의해 SK건설이 시공을 맡은 전농 3동은 지구내에 거주하는 세입자들의 주거대안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채, 지난 95년 2월부터 대책 없는 강제 철거가 진행되어 왔다. 전농 3동 주민들은 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강제철거에 강력한 대응으로 저항했다.

“그들의 요구는 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정당한 것입니다.” 사전 취재를 위해 만났던 우리 대학 부총학생회장의 말이다. 그 당시 이들의 요구는 재개발법 제27조에 의거한 ‘가수용 시설의 건립’이었다. 전농 3동 주민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로 96년 5월 동대문구청에서는 ‘가수용 단지 설치 부지 승인서’를 발부하였고, SK건설과 전농 제4재개발조합에서는 ‘가수용 단지의 건립’을 합의하여 공증하였다.

그러나 가수용 시설의 건립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날아온 것은 SK건설과 재개발조합의 일방적인 공증 파기, 동대문구청에서의 가수용 단지 설치부지 승인 번복이었다. ‘강제 철거 계고장’이 발부되고 수도가 갑자기 끊긴 날, 이들은 강제철거와 공사를 막기 위해 18미터 철탑(일명 ‘골리앗’) 위로 올라가야 했다.

급기야 97년 7월 25일, SK건설과 재개발조합, 동대문구청은 300여명의 적준 용역(현 다원 건설) 깡패들과 청량리 경찰서 전투경찰 600여명을 동원하여 방화철거를 강행하였고 주민 9명이 전신골절의 중부상을 입었고, 두 아이의 엄마인 박순덕(당시 35세)씨는 사망하였다. 그리고 2년여간의 천막 생활, 계속되는 투쟁.

“그때 학생들이 없었으면 견디지 못했지.” 오랜 투쟁 생활동안 같이 활동해준 학생들에 대한 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서울대, 이화여대, 한국외국어대, 한양대 등 많은 대학의 학생들이 이들과 함께 했다. 그 중에서도 중추적인 활동은 전농동에 위치한 우리 대학 학생들이 맡았다.

“밖에 있는 그림도 시립대 학생들이 그린 거야. 지금도 그리고 있어.” 철거민대책위의 조영복 총무는 푸근한 웃음으로 투쟁당시를 회고한다.

이들은 작년 8월 투쟁을 마치고 현재 올 10월쯤에 있을 임대주택 입주를 바라보고 있다. 처음에는 약 90여 가구, 가수용 시설 공증을 받은 것은 52가구, 입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6가구. 너무도 힘들고 오랜 기간이었다. 현재 이들은 6가구가 5년여 동안 버티면서 얻어낸 3동의 임대 주택 안에 박순덕 열사추모비건립을 추진 중이다.

“만일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또 한번 부딪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임대주택의 의미를 모르거든.” 몸에 배어있는 투쟁생활에서 나오는 결연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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