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철학

나는 언제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내가 의도하는 일의 방해물이 사라졌을 때 나는 자유롭다는 감정을 가지고 그 일을 완수한다. 그래서 자유는 모든 금지가 사라진 소위 구속의 부재로, 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런데 자유란 진정 그런 것인가?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어린이가 새처럼 날고 싶어서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어할 때, 그대로 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는 과연 자유로운 것일까? 그 어린이는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결코 자유롭게 투신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이를 수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금지를 명해야만 더욱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몸에 나쁜 줄 뻔히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것과 병을 치료하기 위해 쓴 약을 먹는 것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자유에 가까운가?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담배를 원하고, 그에게 금연을 요구하면 자유를 박탈당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 경우 담배를 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원하는 것이므로 사실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담배가 그의 의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물음을 선택지로 제시해보자. 나는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아니면 결정된 존재인가 다시 예를 들어 주말에 동료들과 등산을 할 때 숨이차서 주저앉게 되었다면, 그때 나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아니면 결정된 존재인가 피곤함이 내가 정상까지 오르는 것을 포기하도록 결정한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갈 수도 있지만 내가 자유롭게 포기한 것인가 죽을힘을 다하면 물론 끝까지 오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상에 도달하려는 계획과 편안하게 삶을 유지하려는 계획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 때 같은 장소, 같은 고통이라 할지라도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녀가 부상을 당한 채 정상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모든 상황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한국 땅에,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한 남자로 태어난 것은 분명 내가 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 절대적인 자유란 없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나는 자유롭게 여러 가지 가능성들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다. 나는 절대적인 자유는 갖고 있지 않지만 주어진 조건에 상대적이나마 하나의 행동을 전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나의 자유는 상대적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이다.

자유로운 존재이기 위해서는 이렇게 선택할 수 있음으로 충분한가? 앞에서 이미 무지로 선택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님을 보았다. 평온한 삶을 방해하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여 내가 수술을 받기로 했다고 하자. 수술을 아무나 또 아무렇게나 해도 병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전문적인 의학지식에 의해서 결정된 수술 프로그램만이 나를 질병에서 자유롭게 한다. 즉 치밀하게 결정된 일련의 과정만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질병이 나의 죽음을 결정한다면, 그 치유는 지식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구속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속에 대하여 알아야만 하고 나의 행위는 그러한 지식을 통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또 다른 구속이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결코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운명이지만 구속들을 점점 줄여 나갈 수는 있다.

요컨대 나에게 있어서 자유는 해방으로의 무한한 과정처럼 보인다. 그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인류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 정치와 사회의 진보는 우리에게 다양한 구속들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문제는 어떤 지식과 어떤 문화가 우리에게 가장 많은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는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차건희 교수
(철학/문화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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