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프리즘

“여기서도 낙선운동은 잘 헌다고 허는디, 김대중하고 연결됐다고도 허고... 사실 민주당은 별루 없고 자민련이나 한나라당만 많잖여.” 얼마 전 충청도에 있는 집에 내려 갔다가 들은 이야기다. 낙선운동이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총선시민연대가 반향을 일으키며 시작했던 ‘시민혁명’이 현실의 문턱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혹 이번 시도마저 실패로 끝난다면 한국의 진보세력은 91년 현실사회주의 실패 이후 또다른 위기감에 쌓일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총선시민연대의 박원순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은 “이번 낙천 낙선운동이 실질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며 꼬리를 내리는 듯한 인상이었다.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을까. 현실의 높은 벽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을까.

안토니오 폴리토가 에릭 홉스봄과의 대화를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한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에서 홉스봄은 “세상에 대한 절제된 기대감이 끔찍한 해악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게 한다”는 데 동의를 표한다. 총선시민연대의 조심스러움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러나 곧바로 홉스봄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왜 불행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정’을 주문한다. 그렇다면 ‘실천적 공산주의’라는 자신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거의 폐기되고 있음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빈부 격차와 환경오염 등 냉엄한 현실 앞에서 과학 발전의 ‘핑크빛 21세기’만 논할 수는 없다.

한겨레신문사의 21세기 전망기사들을 모은 <새 천년, 새 세기를 말한다>는 ‘정보와 과학’의 명암을 두루 비추고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진단하며 홉스봄의 ‘이상’에 메스를 댄다. 부와 생산성의 축적을 일궈낸 자본주의의 발달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수명을 단축한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원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원하는 미국의 횡포는 비록 한풀 꺾이겠지만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이며 한반도의 운명은 한반도가 아닌 주변 4강(미국, 일본, 중국, 소련)에 의해 좌우될 것입을 주장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새 천년…>에서 “이러한 현실을 고려한 생존전략을 짜야한다”고 강조한다. 지역주의와 세계화, 좌와 우의 퓨전 현실 앞에서 ‘진보와 이상’의 주체성은 이미 타자에게로 넘어갔음을 인정하라는 다그침이다.

독일 뮌스턴대학의 송두율 교수는 <21세기와의 대화>에서 ‘진보는 미로다’라는 보드리야르의 주장과 ‘이상향은 적극적인 행동보다는 이를 포기하게끔 만든다’는 데리다의 비판에 동의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긴장’을 강조한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감각이 더욱 실천적인 동기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홉스봄은 현실과의 타협보다는 여전히 ‘이상’이 유효하다고 본다. ‘공산주의’를 지탱점으로 살아온 그는 “여전히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는 것은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정이 없으면 인간의 본래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낙선·낙천운동’은 실패할 수도 있다. ‘무혈혁명’의 한계라고 자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멀게 보이지만 답은 바로 옆에 있을 수 있는 미로 속의 진보를 20세기의 눈으로 보는 것은 ‘진보를 말하는 보수’로 흐를 수 있다. 현실과 이상을 씨줄과 날줄로 엮는 작업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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