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문화체험 - 5·18기념 연극 ‘봄날’을 보고

“5월에 광주시내를 걷게 되면 하늘을 보지 말아요.
봄볕의 하늘을 아득히 쳐다보고 나면, 땅엔 어느덧 붉은 피꽃이 피어 있으니 봄하늘에 가득한 잊혀진 영혼들이 ‘실은 나 무섭고 외로워서 울고 싶었다’고 땅에다 피꽃을 뿌리고 보아 달라 합니다. 나를 기억해 달라 합니다
그래, 그 마르고 갈라진 땅에도 피꽃이 촉촉히 피를 머금고 피어버렸습니다.”

연극 ‘봄날’을 보면서 나의 개인적인 삶과 역사라는 것을 겹쳐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얼핏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는 역사라는 그 강에, 실제로는 내가 깊숙이 빠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강의 흐름을 따라 같이 흘러가기도 하고, 힘겹게 거스르기도 하면서 역사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그들도 소위 ‘진압대’라는 군인들이 그들의 삶에 끼어들기 전까진 그냥 보통 시민들이었다.

무엇이, 평범했던 그들에게 고독하고 비참한 죽음을 선택하도록 했는가? 내 삶도 그들의 삶과 별로 틀리지 않았고, 그런 처절한 싸움의 계속이 나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었다는 것을 수긍하면서도 당혹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일팔! ‘그냥 시위 한 번 크게 일어났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좀 다치고, 몇 명 죽었다더라’고 스치듯 기억해 버린 그 사건에 이렇게까지 가슴이 뻥 뚫릴 듯한 슬픔과 외로움, 씻을 수 없는 자괴감이 묻혀 있을 줄은 몰랐다. 이유없이 당한 부당한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 분노를 제대로 곱씹어 보기도 전에 분신같던 이들을 허무하게 잃어야 했던 슬픔, 돌아봐 주지도 않는, 어쩌면 기억도 해 주지 않을 그 힘겨운 싸움을 버티며 죽음의 순간을 맞아야 했던 외로움들….

시키는 대로 인형처럼 움직이며 ‘내가 때리고 있는 이 사람의 피는 왜 붉은가’하고 의문을 가졌던 군인들, 군부. 시킨 것은 보이지 않는 목소리 인간이었으나, 행한 건 시민들과 별 다를 바 없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파괴되었다. 나를 잃어버리고, 강제적으로 잃어버렸던 나에 대한 책임을 평생토록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다. 손에서 핏물이 빠지질 않았다. 시민들과 군인들은 다들 피해자였다. 누구에게도 타인의 삶을 파괴시킬 권리는 없다고 한다.

과연 그랬다. 그들 스스로의 삶이 파괴되었다.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았던 군인도, 그 군인에 맞서 같이 총을 들었던 시민들도. 결국은 스스로를 향해 총구를 들이민 것과 같았다. 시민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것처럼, 제복을 입었던 젊은이들도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안길 수 없었다. 목소리 인간들은 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했는가? 목소리 인간, 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 자만했는가?

극장을 나서며 멀리 가로등불들이 보였다. 밤안개에 싸인 그 불빛들이 그렇게 눈을 잡아 끈 것은 광주의 5월, 그 어느 새벽에, 헤드라이트 켜고 경적을 울리며 ‘나도 분노하노라’고 외쳤던 택시들을 연상케 해서였다. 희생을 치르고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의연했던가! 그런 믿음을 모조리 짓밟히고 계엄군의 총을 기다릴 때, 그들은 얼마나 외로웠는가! 난 그랬던 그들에게 어떻게 해 줘야 할 지를 모르겠다. 그냥 기억해 준다는 것 외에….

노지현<국어국문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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