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철학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을 가다 보면 “우리 ○○구의 일꾼, 국민의 공복, …, 기호 ○번 ○○○입니다. 제가 당선되면 …하고 …도 하고 …도 하겠으니 저를 한번 믿고 국회로 보내 주십시요”라는 스피커 ‘굉음들’이 길거리 곳곳마다 그치질 않았다. 수많은 ‘공약’들이 아무 걸러짐 없이 거침없게 난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87년 대선 때 “이 사람 믿어 주세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도대체 무엇을 믿어 달라는 것인지, 그러한 믿음이 왜 정당한 것인지 그 내용을 명확하게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 주장하기는 쉬워도 그 주장이 정당한 것임을 보이고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을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구분될까?

우리는 가령 자연에 관한 정교한 과학적 탐구의 결과들에 대해선, 이를 ‘안다’라고 말하지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종교와 관련해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하지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에 관한 이해는 ‘앎’과 관련되고, ‘믿음’은 주로 주관적인 가치판단과 관련된 문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연유하는가?

철학에서‘안다’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무엇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옳은 것이며 나아가 그 믿음이 옳음을 우리가 정당하게 옹호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무엇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앎의 결과를 지식이라고 말한다면, 지식은 곧 ‘정당화된 옳은 믿음’이 되는 것이다. 믿음이 ‘재료’라면 지식은 어떤 공정을 통해 잘 다듬어진 ‘제품’에 비유될 수 있다. 이처럼 앎과 지식은 믿음보다 훨씬 복잡하고 엄격한 인식 절차를 필요로 한다.
17세기 근세의 시작과 함께 신 중심의 세계가 인간 중심의 세계로 전환되면서 인간은 모든 사유와 행위의 주체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사유의 정당성과 객관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공통된 내재적 절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간 모두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공통되고 합리적인 인식 절차가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발생시킴과 아울러 그 믿음에 대한 신뢰, 곧 객관성과 확실성을 부여해 준다고 본 것이다. ‘단순히 믿는다는 것’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을 철저히 구분함으로써, 인간의 사유가 매우 합당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어떤 주장이나 믿음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참된 지식이 되기 위해선 이처럼 엄격한 절차와 과정이 필요하다. 단순히 주장하는 것을 뛰어 넘어 그 주장이 옳음을 명확한 근거로 뒷받침하여 정당하게 보여 줄 수 있어야 그것이 누구에게나 설득력있는 참된 주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거 판에서의 유세, 협상과정에서의 대화에서처럼 이를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잦다. 대개 자신들의 믿음을 주장하기에 급급하다. 아마 몰라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고 매우 힘들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서로를 신뢰하는 공동체를 만들려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보이려는 책임있는 자세, 올바른 앎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노력이 좀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중원 교수
(철학 / 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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