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 그사건 지금은 - 조계사 농성단

500일이라는 학생운동 사상 초유의 장기농성, 조계사 사상 처음의 정치집회, 국제 엠네스티 사무총장 ‘피에르 사네’, 스웨덴 사민당 청년위원회, 일본, 호주의 진보적 단체들의 줄을 이은 지지의 발걸음들과 수배자가족협의회(수가협)의 조직 등 여러가지 성과들을 조계사 농성단원들은 이루어내었다.

조계사 농성단원들의 근황을 듣기 위해, 연세대로 이창희(단국대 88)씨를 만나러 갔다. 그 전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 들려 조계사농성단 자료집인 ‘창살없는 감옥’을 얻어 지하철 안에서 뒤적여 보았다.

지난 98년 8월 9일, 김영삼 정권 시절의 정치수배 해제를 요구하며 한여름의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8명의 학생들이 조계사로 들어갔다. 이들은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간부들로 구 정권시국관련 수배자들이다. 이들의 혐의는 한총련 이적 규정과 국가보안법에 의한 정치수배였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7년까지. ‘ … 분단과 예속과 굴종의 역사는 우리를 도서관보다는 거리와 더 가깝게 만들었듯이, 치졸한 자유보다는 불편하더라도 명예와 자존을 지킬 것을 명하였던 것이다 … ‘라고 농성단장이었던 오창규 씨는 자료집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농성 500일이 가까워질 무렵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99년 12월 둘째주 청와대 민정수석실 임삼진 국장의 방문으로 청와대와 직접적인 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의 주요 내용은 “한총련 탈퇴서와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는 대신, 이는 민감한 사안이니 서로 언급도 표명도 하지 말자”는 것과 “6명의 선별구속자를 제외한 전원을 불구속 처리한다. 6인중 3인은 구속기간 10일 정도로, 나머지 3인은 구속기간 40일을 넘기지 않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협상안을 받아들이고 99년 12월 21일로 17개월간의 농성을 접고, 서울지검으로 42명중 18명이 자진출두했죠.” 오창규, 최태진, 유병문, 진재영, 유영업, 최원석 등 6명이 선별되었다. 그러나 검찰은 출두자가 적다는 이유로 재조사를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3월 17일 오창규 씨와 최태진 씨가 집행유예를, 유병문 씨가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병문이가 그러더군요. 아직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유병문 씨의 실형선고는 조계사 농성단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에 각종 사회단체들과 조계사 농성단원들은 대책위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현재 조계사에서 석방 촉구 법회를 열고, 약속의 재이행을 요구하며 항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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