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프리즘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바위 틈을 발견하게 되고 이상한 광채가 나는 그곳을 들어가니 유토피아같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는 이야기는 동심을 자극하는 동화책이나 만화영화에서 주로 사용하는 수법이다.

황석영이 발견했다는 ‘오래된 정원’도 허무맹랑하긴 하지만 그곳에서 고향의 냄새를 읽을 수 있다. 황석영이 좪무기의 그늘좫 이후 13년 만에 들고 나온 좪오래된 정원좫은 현실사회주의 붕괴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진 못하지만 민중이라는 원초적 고향에 대한 연민과 여전히 부대끼고 있다.

황석영을 대변하는 오현우의 애인 한윤희는 베를린에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황석영은 송영태와 이희수를 통해 앞으로 자신이 가야할 길을 고민한다. 송영태는 여전히 민중운동을 유일한 대안으로 고수하고, 이희수는 환경친화적 생태론자로 그려진다. 아직도 민중운동인가라는 현실적 질문에 황석영은 이희수의 교통사고와 송영태의 모스크바 여행으로 중복처리하며 민중운동에 무게중심을 둔다.

일단 송영태는 민중을 재출발의 원점으로 설정하고 외진 곳으로 떠난다. 현실사회주의를 붕괴시키고 거대한 자본이 다시 자신들의 편으로 물꼬를 돌려놓은 회귀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되 지금은 스스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민중운동의 방향전환보다는 자기성찰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도 같이 시사하고 있다.

좪오래된 정원좫에 묻어 있는 황석영의 고민은 결국 ‘갈뫼’라는 곳에서 출발하고 그곳으로 귀속된다. 국가보안법으로 수배돼 숨어 들어간 갈뫼에서의 한윤희와의 동거생활은 자유와 평등의 시간이었다. 그들의 딸 ‘은결’에 대한 인내와 배려는 갈뫼를 향한 그들의 마음과 일치한다.

‘갈뫼’를 촘촘히 살피다 보면 김승옥의 ‘무진’과 상통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실패의 뒤안길에서 찾아 들었던 곳이 바로 무진이었다는 점이다. 유일한 안식처이자 새로운 힘을 받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두꺼운 안개비에 싸여 주위는 사라지고 온전히 자신만 남는 절대고독과 절대자유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면서 스스로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황석영과 김승옥의 아우성은 갈뫼와 무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무진에서의 ‘나’는 결국 서울로의 상경을 시도하면서 그것은 순전히 현실적인 타협임을 내비친다. 여전히 무진의 순수성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4. 13 총선이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사이에서 현재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한다. 결국은 체제 내에서 모순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것이 가능한가와 체제의 전면적인 변화가 어렵다면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다. 갈뫼와 무진은 현실을 인정하길 촉구하고 또다시 원점으로부터의 자기성찰을 요구한다. 황석영은 현실사회주의의 깨어진 조각들을 다르게 맞춰보자고 제안한다. 민중의 틀 속에서 ‘은결’을 만들어 가는 작업엔 성과보다는 오랜 기다림과 뜸들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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