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5월, 우리가 ‘가정의 달’이라 부르고 있고,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이 몰려있다. 그래서인지 지금 전농동 네거리에는 「청소년! 새 천년의 희망입니다」라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요사이 청소년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정현의 「바꿔」로 상징되는 연예계를 필두로, 스포츠, 바둑, 사이버공간, 벤처기업, 그리고 제16대 총선에서 소위 386세대의 국회진출이 두드러졌다. 청소년이야말로 정보화, 세계화를 알차게 실현할 일꾼들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사회는 자본제적 생산양식 속에서 핵가족 제도로의 구조변화를 겪으면서, 가족 내에서 아버지의 기능상실과 아버지의 권위주의적 지위의 약화를 초래했고, 동시에 가족이라는 보호구역을 병합해 버리고, 자라나는 사람들의 사회화를 가족 외의 기관들이 수행하도록 떠맡겨 버렸다. 한국사회도 뒤늦게 서구사회를 모델로 근대화를 수행하면서 서구의 핵가족제도의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이 에너지원이 되어, 한국사회는 엘리트관료로 구성된 행정체계가 앞에서 끌고, 순발력 있는 재벌기업들이 축이 된 경제체제가 뒤에서 미는 사회체제를 구축했다.

반면에 상황세계의 사적영역의 축인 가족은 전통적인 사회화가 단절된 채, 현실이 강요하는 핵가족제도로 급속히 재편되어 갔다.

중·상층의 경우, 자본제적 생산양식의 바람잡이인 대중매체와 소비문화의 압박으로 인한 생활비 증가,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자녀들의 과외열풍,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직장의 압력, 여성해방운동의 여파로 인한 아내들의 사회적 활동의 일반화, 그리고 과거 정치적 정통성이 취약했던 정권이 퍼트린 회음제 후유증인 문란한 성윤리속에 뒤범벅되어 있다.

하층의 경우,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부부맞벌이, 해이해진 성윤리 등으로, 심한 경우에는 아내의 가출로 인한 가족해체까지도 빈발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당연히 선장노릇을 해야할 아버지, 남편의 위상은 위축일로를 걸어왔다.

20세기 전반기까지 온존해왔던 아버지의 위상은 급전직하했다. 이제 가족 내에서 생가는 문제들(아동학대, 구타, 성폭행 등)은 더 이상 가족에게 맡겨지지 않고, 법률화경향에 따라 가족 외의 공적기관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또한 가족구성원들 모두 자기 앞의 삶을 꾸리기가 바빠,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구조가 사라지고, 형식적인 가족형태만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한편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문제의 중요성이 경감되고, 다른 한편으론 청년기 위기가 증대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자녀들은 자극에 민감하게 되고, 더불어 부모들의 행동에서 보이는 불안정성은 소위 고상한 방임이라는 의미에서 자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결과 자기정체성 형성이 가족에서부터 분리됨으로써 앞선 세대가 다음 세대에 갖는 접속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초래되었다.

요약하면, 사회체계가 생활세계인 것처럼 자인되면서, 생활세계가 사회체계에 흡수되어 버린다. 따라서 현재의 가족의 붕괴는 국가권력의 강화로 귀결됨으로써, 미래에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우리의 소망은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게 될 것 같다.

이병혁 교수
(도시사회/언어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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