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그가 사회에 던지는 언어들은 늘 화제가 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제가 아니라 논란이었다. 그는 엉뚱한 논리를 그럴 듯 하게 포장하는 데 능하다. 기만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럴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정반대의 논리를 편다. 이문열은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게 이문열의 힘이다.

최근 언론 인터뷰를 보면 이문열의 재주가 확연히 드러낸다. 탄핵안에 대한 그의 논리는 교묘할 정도로 정밀하다. 스웨덴의 한 재벌이 교통위반으로 112만달러나 되는 벌금을 내게 된 것을 예로 들며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시되지 않는 것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탄핵사유가 된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문열의 ‘대통령’은 완벽한 사적 개인만을 말할 뿐, 현실에서 존재하는 대통령의 국가 원수, 군통수권자와 같은 개념은 빠져있다.

대통령이기에 탄핵사유가 된다는 주장을 역으로 생각해보자.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다. 그런데 사유가 일반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거나, 문제가 되더라도 사소한 것이다. 국민들이 그런 결정을 납득할 수 있을까? 국민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앞서 말했던 대통령이 가지는 정치적인 의미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외면하고 단세포적인 논리를 고수하는 것에는, 이문열의 고의성이 다분히 묻어난다. 이문열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

이문열은 한나라당의 탄핵안 철회 움직임은 잘못됐다며 강공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촛불집회에 대해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적의가 돼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공격을 계속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촛불집회는 적의니 증오니 하는 단어를 쓰며 폄하하고 있다.

촛불집회에, 그는 ‘개인숭배주의’, ‘반이성주의’, ‘친정권적’, ‘불순하고 비민주적인 발상’,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 등 혐오적인 단어는 거의 다 갖다 붙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문열은 촛불시위를 음모론으로 모는, 소설가다운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문열의 음모론은 증거가 없다. 논리 자체가 없기에 반박할 수도 없다. 허상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그 허상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겠는가. 촛불집회에 배후가 있다고 한다면 반박할 수 있는 말은 ‘그렇지 않다’ 뿐이다.


사실, 그렇게 민주주의를 사랑하시는 고매하신 분이 5공, 6공 시절에는 그렇게도 조용히 지냈는지 궁금하다. 지금도 이문열은 독재 세력에 무척이나 관대하다. 오죽하면 자신이 지지했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역사 바로세우기’를 시작하자 그것을 집단 히스테리라고 했겠는가. 군부 독재를 끌어내린 국민의 힘을, 이문열은 ‘다수를 가장한 소수의 힘’이라고 표현한다.

누군가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모른다’고 했다. 진정 민주와 자유가 필요했던 시기에 그것을 갈망하지 않았던 자가 이제야 민주니 자유니 하고 설교하는 모습은, 매우 볼썽사납다. 먼 훗날, 우리는 이문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이문열이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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