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문화 교류 어떻게 할 것인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보면, 격렬한 내전이 벌어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방문한 한 프랑스 저널리스트가 그곳의 황폐함을 보고 “과거에는 이곳도 사또브리앙이나 네르발이 묘사한 동양이었는데……”하며 개탄하는 부분이 나온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동양’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었던 것이며, 그는 그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아쉬워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하면, 그가 가지고 있던 ‘동양’에 대한 생각은 서양의 이미지, 관념, 성격을 정의하는데 도움이 되는 타자의 이미지다. 서양은 그들의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보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기준으로 자신들과의 ‘차이’를 가치매김하였으며,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어떠한가?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북한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왔다는 비판에서 우리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 50년이라는 단절의 기간은 북한에 대한 단일한 표상, 북한 사람들이 정의되는 단일한 방식, 북한의 현실을 정의하는 단일한 기준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그 기간동안 북한은 그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었기에 비하되거나 낭만화될 수 있었으며 그 경제적 격차가 크기에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1998년 이후 활발히 소개되기 시작한 여러 북한 기행문에서 우리는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의 원형”(고은, <중앙일보>, 1998. 12.23)으로서의 북한과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따뜻하며 넉넉함을 지니고 있는 북한 사람들, 푸근함·공손함·절제·예의바름·성실이라는 미덕을 고스란히 온존시키고 있는 “한국 여성상”(이호철, <동아일보>, 1998. 9. 8)을 만날 수 있다. 즉 북한은 민족의 원형, 고향, 원초적 자연성을 지닌 보호되어야 될 대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이러한 원형/변형, 자연/문명, 남성/여성 등의 이분법 속에서 북한은 남한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방식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처럼 북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초래하는 지나친 비화나 미화는 점차로 확대될 남북한의 문화 교류에 문화 충격을 극대화시키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번 8·15 이산가족들의 만남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남북한의 문화는 언어차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생활 방식의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문화 충격을 예감케 한다. 단적인 예로 지난 8월 20일에서 22일 방문한 북한의 조선 국립교향악단의 한 북쪽 연주자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려진 포스터가 비에 젖자 울면서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항의하여 포스터를 수거해야 하는 상황은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와 이질성을 잘 드러내준다.

그동안 남북한 교류의 장애 요소로서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비관적인 전망과 우려를 나타내게 했던 이러한 이질성은 남북 문화 교류에 있어 고려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이질성을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가?

여기에 남북 문화 통합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탈분단 시대를 열며』의 공저자 조한혜정 교수(연세대 사회학과)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동화가 아니라 공존적인 통합이며, 이 작업은 문화적 상대주의의 전제가 확실하게 뿌리 내리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남북의 문화적 통합은 내부의 이질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로 인해 생길 이점을 살려냄과 동시에 그로 인해 생길 갈등에 예민하게 대응하는 힘을 길러 가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동질성의 확대’나 ‘이질성의 극복’이 아니라 두 문화가 지닌 이질성을 하나로 통합시키려고 하는 획일주의적 사고를 넘어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며 존중하는 문화상대주의적 시선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 문화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과 남한 즉 우리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반성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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