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프리즘
하늘과 맞닿아 허연 봉오리가 허연 구름으로 허리잘린 광경을 그려보라. 자연의 근엄함 속에서 여전히 인간의 존재는 작아지기만 한다. 백두산이며 지리산 같은 한반도의 거산들에 대해서도 그러할진데 8,000미터를 넘는 인도와 티벳, 파키스탄, 중국을 잇는 히말라야의 산들 앞에 홀로 선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엄마의 마지막 산 K2」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보다 200미터 낮은 K2(8,611미터) 트레킹(산악지대나 오지를 주로 도보로 여행하는 것)의 여정을 날씨만큼 격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K2정복 후 하산길에 죽은 아내이며 엄마인 알리슨의 발자취를 남편과 자녀들이 고스란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시선은 움직인다. 이 가족의 일정과 알리슨의 유고일기의 날짜가 겹쳐지면서 살붙이에 대한 끈끈함을 전달한다. 에베레스트를 오른 최초의 여자 산악인으로 이미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던 알리슨이기에 그 가족들의 추모등반에도 BBC가 동행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이목은 오히려 K2를 작게 만들고 인간적이고 때론 작위적인 카메라 트랙과 국제적인 이해관계 속에 세계 제2봉을 뒤로 쳐지게 한다. 각 언론사의 취재경쟁과 협조회사들의 광고섭외, 파키스탄 부토 수상의 등반협조 성명, 각 지역 유지들의 환대가 절반이상을 잠식하면서 K2는 사라지고 흥행성 저널리즘이나 알리슨에 대한 영웅적 서사시만이 앙상하게 남는다. 다만 파키스탄의 생활풍습에서 K2 베이스캠프(5,100미터)까지의 짧게 서술된 여정은 ‘클리프 행어’를 보듯 눈에 선하게 그려지며 위안을 준다. 짚차로의 이동을 마치고 도보로 걸으면서 보고 겪는 산사태와 잡향들, 고산등반안내인인 셀파와 짐을 나르는 포터들, 그리고 각종 차와 음식, 풍습들이 어우러지고 죽음과 가까이에서 대면하게 되면서 비로소 히말라야를 그린 고은의 시편과 손을 잡게 된다.
하지만 현실과 완전하게 유리된 산과의 밀회를 철저하게 거부하며 ‘히말라야를 노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상을 노래하기 위해서’ 라싸에 간 고은은 아내 몫에 대한 지상의 부담을 뒤로 하고 혈육의 죽음을 산에 묻는 제임스와는 다르다. 칠순을 눈앞에 둔 노시인의 절규가 배어 있다. ‘나는 누구인가?’ 「히말라야 시편」은 줄곧 자신을 혹독하게 돌리고 돌린다. 코라! 원시와 문명이 엉성하게 섞여 있는 라싸를 지나 ‘산이 커지고 광야가 넓어질수록 마을은 작아지고’ 인간은 사라진다. 죽어감과 살아감, 죽음과 태어남의 경계가 무뎌진 히말라야의 마을들. 통쾌하도록 지혜는 불필요해지고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 모든 게 ‘세월넘어 한바탕 웃어버리’면 그만이다. ‘모르는 행복 모르는 해탈 모르는 하루하루’가 극히 정상인 ‘고도 4천3백 미터쯤의 마을’. 죽은 자의 시신을 갈라 새들의 먹이로 제공하는 조장(鳥葬)이나 비를 맞아 목욕을 대신하는 모습은 자연과의 구분을 거부하는 자연스러움이다.
60%도 안 되는 산소와 극심한 날씨의 윽박지름 속에서는 의도적으로라도 현실과의 괴리를 자청할만도 한데 고은은 지상의 보따리를 그냥 두지 못한다. 6천미터의 상공에서도 한숨을 거두지 않는다. ‘저 아래 사바세계는/ 자비보다/ 무자비 쪽이다/ 훨씬’. 이것은 고은이 노구를 이끌고 험난한 곳을 자청한 것이나 그 이유가 자신을 돌아보고 ‘제자리’를 찾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얼마전 엄홍길씨가 K2를 정복하여 에베레스트 8,000미터 이상 고봉 14좌를 완등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 박영석씨는 현재 12좌를 정복한 상태다. 이들이 동료의 시체를 얼음 속에 묻어가면서도 정상을 향한 그리움을 접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엄마의 마지막 산 K2」를 넘어 「히말라야 시편」의 중턱을 넘을 쯤이면 강렬한 햇빛에 희뿌연 구름이 걷히면서 저 멀리 고봉의 자태가 보이듯 정답의 중간 정도는 어림할 수 있을 것이다.
박준규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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