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역사읽기

중국 상해(上海)! 한국영화의 새로운 메카로 부각되고 있다. ‘비천무’, ‘아나키스트’ 등이 상해에 있는 넓이 60만평의 광활한 오픈세트에서 촬영을 마쳤는데, 1900년대 초반의 중국 풍광이 남아있고 또 오랜 경험을 지닌 현지 제작 스탭들의 지원 등이 국내 영화제작사들의 구미를 당기는 모양이다. 우연인지 올 여름 ‘상하이 눈’이라는 외국영화도 개봉되어 올 여름은 중국의 국제도시 ‘상해’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정무문’ 등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상해는 서구열강의 대사관과 영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으로 비교적 치외법권이 잘 적용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옛 향수를 자극하는 곳으로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상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역사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액션느와르 ‘아나키스트’였다. 상해란 도시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닐까. 그러나 이 영화의 포인트는 이곳의 위치설정과 외교론에 치우친 것 때문에 비난받고 있는 임정이 아니라 아나키스트이다.

그동안의 항일투쟁사 연구에 있어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의 투쟁에 비해 과소평과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최근 고조되는 한국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적·실천적 관심과 이 속에서의 영화제작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 영화는 상해 경신대학살로 가족을 잃은 소년 ‘상구’가 1924년 상해공개처형장에서 단원들을 처음으로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시작한다. 우리 민족해방운동에서 1924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때를 기점으로 국내에서는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이 급성장했다. 또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조직되었는데 조직된 이래 간단없이 계속된 그들의 투쟁은 이희영, 신채호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한국 민족독립운동선상에서 남긴 족적에서도 간취할 수 있다.

1920년대의 중국은 격동의 역사가 그대로 살아 숨쉬던 곳으로, 인위적으로 쥐어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영화적인 공간이다. 우리 역사상 유래 없는 과격 테러 활동을 감행했던 아나키스트들…… 그들이 활약했던 1920년대의 상해는 그 후 오늘날까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를 풍미한 ‘시대정신과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었다. 중국 내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이렇듯 2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45년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나키즘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완전한 개인의 완전한 자유보장이다. 일제의 강제합병으로 일본의 노예로 전략했던 조선민족의 염원이 ‘자유’에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3 ·1운동 이후 전개되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불만을 가진 일부 급진적 한인혁명가들이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 무정부주의에 대한 호감, 중국무정부주의의 영향 등에 의해 당시 사회주의사상의 한 조류인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이론면에서는 크로포트킨의 자유연합이론을 추구하면서 투쟁면에서는 바쿠닌의 혁명적 테러리즘의 경향을 보여주었고, ‘탈환론(奪還論)’과 ‘민중직접혁명론’으로 일제식민치하의 조선 독립을 위한 논리를 전개하였다. 탈환론과 민중직접혁명론은 3·1운동과 같은 타협적 투쟁방법이 아닌 혁명적 투쟁방법을 제시한 이론이었다. 그들의 구호를 보면 아나키스트들의 독립투쟁노선이 가진 기본적 원리는 경제적 측면에서 무정부주의의 이론을 도출해내어 당시의 조선실정에 맞게 각색하여 이론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빼앗긴 것을 되찾자!
倭놈에게 빼앗긴 것은 왜놈에게서
朝鮮놈에게 빼앗긴 것은 조선놈에게서
빼앗아온 모든 것은
永遠히 내가 그 主人이다.
奪還後의 社會는 自由의
無政府共産社會다.

되찾자는 의미인 탈환은 무정부주의자들의 기관지의 이름이기도 한데, 탈환론에서 일제의 조선수탈론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조선을 원위치 시켜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영화 속 아나키스트들인 세르게이, 한명곤, 이근, 돌석, 상구는 무정부주의의 테러리즘(Terrorism)적 경향으로 독립투쟁을 하고 그들의 민주주의적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영화장면에서는 침실과 공연장, 선실에서 가네꼬를 이용해 독립에 방해가 되는 일본인들을 처단했음에도 그들의 행동이 한없이 멋있어 보였던 것은 나라를 위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내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국내나 일본에서의 운동과 비교하여 가장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만큼 하늘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공동으로 기거하는 지하실의 임대료도 내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돌석 등이 사기를 치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중국 내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실제로도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동지획득을 위해 각지로 분산되었다. 각지로의 분산은 중국동지와의 유대를 강화하여 한국혁명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그중 상해로 온 아나카스트들은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서 폭탄제조기술을 배우면서 노동운동에 가담하여 대일영총파엄에 참가하였다.

영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면 좋으련만 고문 후유증으로 아편을 일삼던 세르게이는 조직 내에서 제거되고, 마지막 테러를 완성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한명곤, 이근, 돌석도 정보유출로 귀국에 실패했다. 이처럼 독립을 강하게 갈구하면서 해외까지 나가 고생하고 목숨까지 바친 아나키스트들이 있기에 8월 15일 해방은 더욱 값진 것이다. 아직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화 아나키스트의 마지막 대사를 다시금 되뇌어 본다.

‘그들은 죽어서도 고향에 가지 못했다.
실패자......,
그러나 그들은 위대했다.’

국사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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