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 반가움, 허전함. 그런 감정들이 들었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설레였고, 만나서는 반가웠고, 보내고 나니까 허전하네요”라며 오교수는 씁쓸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오교수의 가족들이 오시인을 떠나보내게 된 것은 1950년 오시인(당시 16세)이 의용군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지내다가 오영재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맨 먼저 안 것은 오형재 교수였다. 1966년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오교수는 방첩대 과장인 노태우 소령(전 대통령)으로부터 형 소식을 전해들었다.
오시인과 오교수의 가족들은 1990년 한겨레신문 9월 4일자 ‘북에서 만난 문인들’이라는 기사를 쓴 미주민족문화예술인협회 회장 김영희씨의 도움으로 서로 편지 한 통씩을 주고받았다. 그 후로는 LA 교포들을 통해 오시인의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상봉 기간 중 이산가족들은 남북의 정치나 경제에 대한 대화는 나눌 수 없었기 때문에 오교수의 가족들은 예전 같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남들이 들으면 사소하다고 느껴질 이야기지만, 우리들은 꽤 즐거웠어요. 추억이죠”라고 오교수는 말했다.
50년만의 만남이라 그리고 50년 전의 기억이라 서로가 알고 있는 것도 많이 달랐다. 오교수가 기억하는 형의 마지막 모습은 50년 전 오시인이 의용군에 가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서 같이 칼국수를 먹던 일이다. 오교수는 고목이 되어가고 있는 이 무화과나무를 확대한 사진을 이번에 형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형은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그 대신 어렸을 때, 형과 내가 장기를 두다가 형이 져서 화풀이로 나를 때린 일은 기억하고 미안하다고 하데요. 난 생각이 안 나는데.”라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50년만의 만남이었다.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다. 짧아서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욱 허전하다고 오교수는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편지를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언론·표현의 자유가 없어도 좋아요. 그저 안부나 서로 알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한민수 기자
idkh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