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로 남북 8·15상봉이 끝났다. 이산가족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엮여서 기사로 나올 만큼 역사적인 만남이었던 이번 상봉에서 가장 많은 말을 남긴 인물은 단연 북쪽의 계관 시인인 오영재씨였다. 3박4일 동안 큰 관심을 몰고 다녔던 오영재 시인의 남쪽 가족인 우리대학 오형재 교수(전산통계)를 만나 상봉기간동안의 심정을 들어봤다.

“설레임, 반가움, 허전함. 그런 감정들이 들었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설레였고, 만나서는 반가웠고, 보내고 나니까 허전하네요”라며 오교수는 씁쓸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오교수의 가족들이 오시인을 떠나보내게 된 것은 1950년 오시인(당시 16세)이 의용군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지내다가 오영재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맨 먼저 안 것은 오형재 교수였다. 1966년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오교수는 방첩대 과장인 노태우 소령(전 대통령)으로부터 형 소식을 전해들었다.

오시인과 오교수의 가족들은 1990년 한겨레신문 9월 4일자 ‘북에서 만난 문인들’이라는 기사를 쓴 미주민족문화예술인협회 회장 김영희씨의 도움으로 서로 편지 한 통씩을 주고받았다. 그 후로는 LA 교포들을 통해 오시인의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상봉 기간 중 이산가족들은 남북의 정치나 경제에 대한 대화는 나눌 수 없었기 때문에 오교수의 가족들은 예전 같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남들이 들으면 사소하다고 느껴질 이야기지만, 우리들은 꽤 즐거웠어요. 추억이죠”라고 오교수는 말했다.

50년만의 만남이라 그리고 50년 전의 기억이라 서로가 알고 있는 것도 많이 달랐다. 오교수가 기억하는 형의 마지막 모습은 50년 전 오시인이 의용군에 가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서 같이 칼국수를 먹던 일이다. 오교수는 고목이 되어가고 있는 이 무화과나무를 확대한 사진을 이번에 형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형은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그 대신 어렸을 때, 형과 내가 장기를 두다가 형이 져서 화풀이로 나를 때린 일은 기억하고 미안하다고 하데요. 난 생각이 안 나는데.”라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50년만의 만남이었다.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다. 짧아서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욱 허전하다고 오교수는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편지를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언론·표현의 자유가 없어도 좋아요. 그저 안부나 서로 알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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