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극우화 조짐에 대해 우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일본에 대한 우려와 경계심은 우리로 하여금 또 하나의 새로운 화두를 던지게 한다. 과연 일본의 극우적 움직임은 우려할만한 정도의 것인가.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본을 얼마만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일본을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한정하여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정대균, 『한국인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강),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제시한 것과 유사하게, 한국인 중 다수에게 일본인은 미를 사랑하지만 칼을 숭배하는 ‘잔혹한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뿌리깊게 박혀있다.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 중 가장 우선적으로 꼽히는 것은 ‘간사/야비하다’고 그 다음이 ‘잔인/무섭다’이다. 즉 일본인은 근면하고 친절하며 단결력이 강하고 생활력이 강하지만, 간사하고, 잔인, 야비하며, 이기적이고, 경제중심주의적이며, 이중적이고, 교활하며, 실리적이고, 경계할 필요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복합적 존재로서의 일본에의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한 민족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지으려 하는 것은 대상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며, 그것은 민족을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균일한 집단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민족구성원들의 역사적, 계층적, 성적 차이를 무시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박유하(세종대 일문과 교수)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사회평론)가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문제제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반일감정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판은 그동안 은폐되어 왔거나 미처 생각지 못한 일본에 관한 우리의 왜곡된 인식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무조건적인 경계나 비난을 하기 이전에 상대방이 처해 있는 입장에 대한 객관적인 고려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과거의 일본을 미화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일본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우경화하는 일본도 분명 일본이지만 그런 움직임을 비판하는 이들도 분명 또 다른 일본의 얼굴이다.…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되, 왜 그들이 그러는지, 또 그런 움직임이 일본을 대표하는 움직임인지까지 보려는 복합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그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의 일본에 관한 대다수의 담론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한국인들의 감정에 호소할 뿐 이성적 판단을 가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 어조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일본에 대한 굴절된 시각의 이면에는 우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단적인 예로 한동안 우리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제가 박아놓았다고 추정되는 쇠말뚝은 누가 그리고 왜 쇠말뚝을 박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오로지 풍수사상에 근거한 어렴풋한 단정과, 식민지 지배에 따른 자학과 패배감으로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모조리 뽑아내야 할’ 일제 침략의 상징으로 둔갑했다. 여기에 전제되는 것은 일본의 간교하고도 교활하며 잔인한 민족성이다. 또한 한동안 베스트셀러로서 독자의 사랑을 받은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너무나도 닮은 무의식적 폭력긍정론일 뿐이며, 세계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20세기 동양의 제국주의의 증거였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부끄러운 과거를 은폐하고 부정하려는 열등감과 적개심의 표출에 다름아니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을 왜곡하는 일이 실은 우리 자신을 왜곡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허영수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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