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프리즘

베수비오 화살폭발로 순식간에 사라졌던 도시 폼페이가 100여년이 넘는 발굴작업을 통해 예전의 모습을 거의 드러내고 있다. 화산재로 뒤덮이기 직전의 생생한 모습을 아직까지 잃지 않고 있는 이 고대도시는 문명과 자연의 기이한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타임캡슐이라 할만하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폼페이의 보존상태를 두고 어느 학자는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역설했다 하니, 패망한 폼페이는 고고학의 훌륭한 교과서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폼페이의 발굴에 투자한 100여년의 시간이 일상인들에게는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현재의 삶도 꾸려나가기 힘든 판국에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난 과거를 파헤치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붓게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삶이 현재라고 하는 제한된 시간개념만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하기 때문 아닐까.

「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노성두, 한길아트)에서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인문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현재를 구성하기 위해 까마득한 신화시대의 과거를 불러모으고 있다. 서구 모더니티의 실질적 출발점으로서 르네상스 시대는 수백년간 신이 점령했던 유럽의 광야에 인간의 깃발을 다시 꽂은 서구 지성사의 일대사건이었다. 이 속에서 서구의 회화는 교회(신)의 도그마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눈(원근법)으로 인간의 희노애락을 바라보는 보다 진솔한 매체로 변화한다. 그러나 보티첼리가 기독교의 신이 아닌 이교의 신 비너스의 탄생 장면을 포착했을 때,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기원전에 제작된 청동조각상이었다. 1506년 로마에서 발굴된 헬레니즘 시대의 라오콘 군상은 구이도 레니를 비롯한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회화의 주제만이 아니라 기술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예술적 전범으로 화한다. 결국 르네상스의 기획은 중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혀 색다른 미래의 상을 보여준다기보다 중세보다 먼 과거를 다시 들추어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대정신의 진보를 꿈꾼 ‘역사의 재발굴’이라 할만하다.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최정은, 한길아트)은 17세기에 발현했다는 정물화의 도상학적 의미를 회화사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언뜻 회화적 재현이상의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물화가 서양의 중세와 고대로 소급되면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품고있는 풍속화 혹은 역사화로 변화함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해골의 정물이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상식일지 몰라도, 서양의 정물화에서 해골은 죽음을 준비하고(memento mori) 삶에 겸손하라는 내재적 함의를 품고있다는 사실은 역시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메시지가 된다.

서구 회화사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이룩한 진보의 맥락들을 추적하는 이 두편의 서적에서, 우리는 유추적으로 폼페이의 이면을 목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폼페이의 발굴에 100년을 투자한 현대인류의 무의식에는 확언할 수 없는 과거를 찾아냄으로써 현재의 삶에 일말의 방향성이나마 건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너무나 강렬해서 세대를 관통하여 굳은 화산재를 뚫는다. 비록 고집스러운 과거가 그 내밀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고 말해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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