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30주기를 맞이하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오는 13일은 평화시장의 이름 없는 재단사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한 ‘인간선언’이 30주년을 맞는 날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현장의 열악함을 고발하고 노동자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으며 한국노동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전태일의 항거는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급속도로 확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동조합운동이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를 소외시켜 왔음이 폭로되었고, 노동문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를 촉진하게 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노동쟁의 발생건수가 1969년 135건, 1970년 165건, 1971년 1656건으로 급격히 증가된 것은 이를 뒷받침 해준다. 한국노동운동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전태일 분신 항거 30주년을 맞이하여 몇 가지 노동운동을 살펴보고 그 성과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과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탄생

87년 7월 5일, 울산현대엔진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불붙기 시작한 파업투쟁은 울산에서 부산, 마산, 창원, 거제까지 번졌다. 경북의 구미,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에 이르는 전국의 모든 지역과 전 업종에 걸쳐서 항쟁이 벌어졌다. 이 3개월 동안의 파업 건수는 3255건, 파업 참가자 수는 122만 명이었다. 87년 대투쟁은 노동조합의 조직역량을 폭발적으로 확대시켰다. 86년에 총 2675개에 불과하던 노동조합의 수가 89년에 이르면 4123개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하게 된다. 계속된 노동운동은 마침내 1990년 1월 600여 개의 단위 민주노조와 20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을 탄생시킨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을 일반화시켰고 한국사회의 대중파업의 특징들을 잉태했다. 87년 이후의 대중파업의 특징은 지역이나 업종에 관계없이 전국적인 연대투쟁의 형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중파업의 대부분이 임금인상, 노동조건의 개선 등의 경제적인 요구를 가지고 출발하지만, 이러한 경제적인 요구를 민주노조의 건설이나 노동조합의 민주화라는 자주적인 단결권 보장 요구와 밀접하게 결합해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공장점거파업과 가두투쟁이라는 투쟁 양식의 발전도 중요한 특징이 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합법화

1998년 10월 31일 노사정위원회는 제10차 본회에서 ‘교원노조설립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정에 합의했고, 99년 7월부터 교원노조의 활동이 전면 합법화되었다. 전교조 합법화 운동 10년만의 성과였다. 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은 87년 결성되었다. 이 전교협은 교원의 노동 3권 쟁취 투쟁이 주요사업이었다. 그리고 89년 5월 18일 드디어 전교조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가공무원법에 공무원은 노조를 결성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이 전교조에 가입한 교원들은 모두 범법자가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전교조와 관련하여 해직되었던 교사의 수는 1천7백11명에 이른다. 합법화 이후 해직교사들은 차차 복직이 되고 있다.

전교조 합법화는 우리 사회의 노동자·노조의 수적 확장을 가져왔다. 또한 정부가 처음으로 공무원의 노조설립을 인정한 것이므로 곳곳에서 노동 3권을 요구하는 공무원들의 노조설립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노사정위원회의 탄생과 주5일 근무제의 합의

1997년 우리 나라에 닥친 IMF는 정리해고라는 불가피한 방법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국민적 합의기구가 필요했다. 1998년 1월 15일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제안에 따라 제1기 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가 발족하였다. 그 동안 마땅한 협의단체 없이 서로 일방적인 주장만을 해오던 노사정간의 관계가 한 단계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발족이후 노사정위에서 계속 제기되 온 근로시간에 대한 문제는 2000년 10월 23일 주5일 근무제에 합의함으로서 표면적으로는 일단락이 되었다. 합의에 따르면 법정근로시간을 주당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연간 실근로시간을 2천4백97시간에서 2천시간 이내로 줄이게 된다. 법정근로시간을 줄일 때는 휴일 및 휴가제도도 함께 개선키로 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라고 아직은 애매하게 합의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창당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80%를 대변하는 정당으로서 노동자와 소외계층의 이익을 지키고 참된 정치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2000년 4.13 총선에 기해 1월 30일 공식 출범한 민주노동당의 창당 선언문 의 일부이다. 그 동안 진보정당이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일이 있긴 하지만 노동자의 자격으로 원내에 진출해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이들이 주장이 대다수가 노동자인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노동자 계급에서 국회의석을 목표로 하는 정당을 만드는 시도는 예전보다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원내진출 그 첫 번째 시도는 실패에 그쳤다. 그리고 총선에서 유효득표수의 2%를 얻지 못한 정당에 대해 등록을 취소토록 한 정당법 조항에 의해 정당등록취소의 상황을 맞았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정당법 조항이 정치활동을 제약한다고 서울행정법원에 중앙선관위를 상대로 행정소송과 함께 등록취소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고 내년 초에 진보진영의 정책연합을 이끌어내 재창당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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