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카치아피카스가 말하는 ‘자율성’의 의미란 무엇인가

자율성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칸트 이후의 서구 철학은 이 용어를 개별적 주체의 독립성을 지칭하는 데 사용해 왔다.

그러나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가 말하는 자율성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의 자율성이다. 그는 개별주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집합적인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자율성을 끌어들인다. 좪신좌파의 상상력좫에 이어 최근 발간한 좪정치의 전복좫을 보면 그의 자율성에 관한 많은 논리들을 접할 수 있다. 좪정치의 전복좫이 주목하는 자율에 대한 문제의식은 68세대, 즉 신좌파로 불리는 이들이 결국 구좌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좪신좌파의 상상력좫이 ‘68혁명’의 세계적 전개과정에 대한 분석이라면, 좪정치의 전복좫은 유럽의 ‘아우토노미아 운동’에 대한 분석이다. 68혁명이란 정확히 32년 전인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 근교의 낭떼르 분교 학생들의 시위에서 촉발되어 다양한 노동자계급이 참여한 전국적인 운동이다. 카치아피카스는 68혁명을 세계적인 혁명이었다고 말하고 그 후의 다양한 사회운동들(아우토노미아 운동)에 대해 자율성의 개념을 도입·설명한다. ‘아우토노미아(Autonomia)’라는 말은 독일어로서 autonom(자주적, 자율의), Autonomie(자치, 자율)와 같이 ‘자율적’이라는 뜻을 지닌다.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역사는 이탈리아에서 시작, 스위스, 암스테르담, 독일, 덴마크 등으로 확산됐다. ‘아우토노멘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페미니스트, 점거자, 생태주의자, 대안추구자 등을 근원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이것은 근대 제도의 중앙집권적인 결정과 위계적인 권위구조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결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한다. 아우토노멘은 수평적인, 심지어 순환적인 집합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위로부터의 지령이 아니라 개인들의 활발한 의사교류가 가능하다. 예전에는 독립적이던 일상생활의 영역들이 점차 상품형태와 이윤율이라는 기준에 의해 포섭되면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가 초래되고, 이는 권력의 공간을 일상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위계적인 조직형태를 거부하고 일상생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결국 궁극의 목표가 ‘정치의 전복’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우토노멘은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상대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아우토노멘은 신좌파와 더불어 시작됐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보다 분명해진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를 드러냈다. ‘근대주의적’ 중심화에서 ‘탈근대적’ 탈중심화로 이행한 것이 그것이다. 20세기 좌파를 움직이던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그 견고함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카치아피카스는 정치체제를 완전히 뒤엎어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억압에 대한 원초적 저항의식’이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에로스 효과(Eros Effect : 인간이 담지할 수 있는 보편성)의 확산이다. 에로스 효과는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라는 말로도 표현 가능하다.

그가 두 권의 책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권위주의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국의 ‘정치의 전복’을 위한 것이다. 정치의 전복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율성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 아닐지 모르나, 인류와 모든 생명체를 위한 필수 형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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