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립군, 시립양들에게는 아줌마이지만 1980년대에 독일 출신 여자 테니스 선수 슈테피 그라프를 나는 참 좋아했다. 슈테피 그라프는 빌리진 킹,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크리스 에버트로 이어지는 여자 테니스계의 진골이다. 그 뒤로는 춘추 전국시대로 모니카 셀레스, 힝기스, 샤라포바, 윌리암스 등은 성골로 이들의 수명은 짧아졌다. 진골은 사골처럼 우러나오는 깊은 맛이 있고 성골은 냉면 육수처럼 신선한 맛이 있다(역사적으로 오해없기 바람. 여기서는 단순 비교임).

말없는 침묵과 팔등신 외모에 그라프의 화려하고 전통적인 포핸드는 탁구선수 유남규의 드라이브를 닮았다. 또 상대방의 강한 드라이브를 수비형 탁구 천재 김기택이 정교한 슬라이스로 받아내는 것처럼, 최고의 요리사가 기가 막힌 회를 뜨는 듯한 아슬아슬하게 네트를 넘기는 백핸드 슬라이스는 나도 모르게 침이 나올 만큼 탄성을 자아냈다.

한때 프랑스에 있을 때 그라프가 썼던 라켓을 잡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그런 그라프가 안드레 애거시와 결혼하다니.... 사랑이야 국경이 없지만 아직 여왕자리를 누려야 할 그라프가 전업주부가 되다니.... 여배우 브룩쉴즈에 이어 슈테피 그라프까지 아내로. 억세게 운 좋은 애거시 녀석.

그런데 차츰 애거시의 성실함이 좋아졌다. 테니스 선수로서 큰 키는 아니지만 특유의 발빠른 부지런함. 베커, 렌들, 보리, 맥켄로, 코너스 등의 세대로서 유일하게 현역에 남아 세계 정상급을 유지하는 성실한 자기관리. 최초로 라이징 볼을 먼저 때리고 양손 백핸드를 구사하는 교타자. 테니스라켓 소재가 무거워 항상 2시 방향에서 임팩트하던 당시에는 12시 방향에서 반 박자 빠르게 변칙을 구사하는 애거시의 폼은 마치, 보수에 물들었던 세대에게는 진보로 느껴졌고 올드보이 테니스인들에게는 거북하게 보였다.

그런 애거시(38)도 떠나고 내가 좋아하던 테니스 1세대들은 모두 코트에서 사라졌다. 나브라틸로바(51), 크리스 에버트(53), 비요른 보리(51), 보리스 베커(40), 이반 렌들(47), 존 맥켄로(48), 지미 코너스(55)...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들도 한때는 갈퀴머리를 휘날리는 젊은 사자였을텐데. 세월을 이기는 힘은 누구에게도 없다던가.

애거시는 마지막 은퇴 경기에서 3대1로 패했다. 관중 2만여 명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애거시는 장내 마이크를 잡고 “코트의 스코어보드는 내가 졌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지난 21년 간 내가 얻었던 것을 다 알려주지는 않았다”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스포츠 선수 중 타고난 천재란 없다. 골프 여왕 애니카 소렌스탐은 우승 트로피를 받은 날 모두가 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골프를 처음 배우는 진지한 학생처럼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열심히 한 것 뿐인데 어느 날 나를 천재라고 한다는 것이란다. 베토벤은 귀가 먹은 후에도 어찌나 열심히 연습했던지 피아노가 다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요즘 샤라포바, 윌리암스, 페데로, 나달 등 예쁘고 힘센 선수들이 뜨는데 이 선수들보다 1세대 선수들이 그리운 건 왜일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를 홀로 지켜보는 어린아이의 인격을 사랑하고 따스한 미소를 주며 가방을 메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들이 시대의 희망처럼 보여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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