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당위적인 이야기를 정색하고 주장하는 것만큼 무안한 것도 없다. 필자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친일파 청산 문제이다.

어느 사회가 내재적으로 안고 있는 모순에 의해 붕괴되고 새로운 사회가 건설된다면, 그 새로운 사회는 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혁파하는 작업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친일파 문제가 그렇다.

식민지 지위를 벗어나 민족국가를 건설했지만, 민족을 배반하고 일신의 안위를 우선했던 자들이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다.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다행히 16대 임기내 통과가 불투명했던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이 3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법안 심사 과정에서 보여준 일부 국회의원과 언론의 모습은 전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친일 행위를 축소 해석하고 법안 심사를 지연시키는 행태에 온 국민은 분노했다. 국민적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지만 의사봉 세 번 두드리는 데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해방 60여 년이 지나도록 민족 국가 건설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왜 여태껏 시행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친일파가 탈을 바꿔쓴 채 아직도 건재하게 한국 사회를 주름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했던 나라다. 조선사편수위원회에서 친일 사관을 확립했던 사학자인 이병도, 신석호가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일했던 나라가 우리나라다. 얼마나 한심스러운 역사인가. 이번 법안 심사 과정은 그러한 재미없는 코미디의 재방송격이다.

공은 다시 국민에게로 넘어왔다. 2003년 대정부 질문에서 고건 총리는 “국가에서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환수한 일은 한 건도 없다”고 밝혔다.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은 반민특위 이후 55년만이다. 뭔가 보여줄 때다.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처리하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들에게 반성하고 사과할 기회를 준 일 조차 없다. 광적으로 ‘죽여라’를 외치는 마녀사냥이 아니라 차분히 역사를 되짚어 보고 어떤 교훈을 찾으려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늦었던 만큼, 멋진 모습을 후손에게 보여줘야겠다. 이제야 겨우 첫걸음을 떼고 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야할 이유다. 친일파 문제와 같은 과거사를 깔끔히 정리하지 않고 내적으로 강인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전혀 없다. 속은 곪을 대로 곪은 상태에서 국민소득 2만달러가 무슨 소용인가? 빈곤한 ‘제국’을 만들고 싶은가? 잿빛으로 산화한 역사는 다시 우리에게 묻고 있다.

welcome2kdk@hanmail.net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