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강철 같은 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해방된 통일 베트남을 위해 일생을 바친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 그의 평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베트남인들은 지상전 10대 1, 공중전 1000대 1이라는 화력차를 극복하고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0∼60년대 베트남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장이 아니었다. 굴곡진 베트남 역사에 자리잡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간의 대결이었다. 오랜 프랑스 식민통치를 벗고 베트남 민족이 건설한 북베트남과,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인 남베트남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맞선 것이었다.
단적으로 북베트남을 이끌던 12인의 위원들 중에서 프랑스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반대로 남베트남의 대통령, 총리는 프랑스 통치 시절 베트남의 육군, 해군 장교였다. 호치민이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선에 자리잡은 밀림을 오가며 민족 해방을 부르짖을 때 그들은 프랑스의 녹봉을 먹으면서 호의호식했다. 미 연합군은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의 편에서 해방군을 ‘사냥’하러 다녔다. 전사자 수를 비교해 보면 미군 5만여 명, 한국군 1만여 명, 베트콩 70여만 명, 북베트남군 100만여 명이다. 이런 수치들 앞에서 ‘사냥’이란 단어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커다란 범죄에 대해 공범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모자 내지 방관자적인 위치에 있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베트남에 보내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진보적인 잡지라 평했던 사상계도 베트남전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민간인 피해 보상금으로 3달러의 푼돈을 쥐어주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자유를 수호한다고 큰소리 쳤다.
‘월남 패망’ 이후 한국은 베트남 특수로 벌어들인 돈으로 고속도로를 만들고 공업단지를 세웠다. 우리가 눈부신 경제 성장을 달리는 사이에 베트남은 후진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00만 베트남인 중 200만명의 민간인이 전쟁으로 사망한 베트남에서, 부모를 잃은 그들이, 자식을 잃은 그들이 파괴된 논, 밭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전쟁 후에도 아직 제거되지 않은 지뢰가 깔려있는 밀림을 끼니를 위해 오고 가는 그들의 두려움에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 누구도 베트남에서 저지른 우리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았다. 우리 군대가 오히려 베트남인들의 자유와 평화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일에 대한 반성 없이는 어떠한 건설적인 관계도 힘들 것이다. 미래는 과거와 화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논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국익’이라는 단어를 보며 베트남을 떠올린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에는 우리 사회가 아직 어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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