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읽어주는 남자


혹 아직도 문학에서 숭고미를 기대하는 이가 있다면, 권혁웅의 시는 읽지 않아야 한다. 그의 시에서 천상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 빈자리에서 영화나 만화의 캐릭터가 부활하곤 하기 때문이다. 추억의 ‘마징가’를 숭고하게(?) 되살리기도 했던 그 아니던가. 위 시편도 그러한 시적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우리 삶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찾아낸 것은 ‘드라마’이다. 그는 드라마라는 한 매체 속의 이야기를 ‘순수’ 혹은 ‘순수의 시대’라 규정한다.

그렇다면 ‘드라마’는 진정 ‘순수’한가? 드라마, 그리고 그 외의 숱한 매체들은 가장 ‘순수’ 아니 순진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드라마를 위시한 매체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쩌면 ‘불온’하다고 평가해야 하는 무엇이다. 그러나 그 불온성은 드라마가 만들어온 ‘홍익인간’이라는, 또 ‘삼인칭들의 족보’라는 허상에 대한 불신을 말할 따름이지 ‘불온’이라는 말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불온성은 아니다. 한편 이 시에는 그러한 드라마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 바로 ‘사생활의 역사’이다.

그것은 이면지에 기록될 뿐이다. 언제든 구겨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생활 속에 깊게 들어와 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그들을 세상에 이끌어낸 수많은 ‘손’들은 과연 순수했던가?

박성필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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