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④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민족의 명절 한가위는 끝났지만 ‘이등’ 민족의 수난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최근 백화점과 유통업계를 중심으로 마사지기 류의 상품과 접시 깨기 이벤트 등으로 지친 주부들을 공략하는 마케팅이 극성인 걸 보면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판 벌리는 사람 따로 있고 수습하는 사람 따로 있는 한 명절 증후군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상식은 또 한 번 배반당하고 만다. 사색의 역사라고 별반 다르진 않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저지르는 유형’이라면, 그들의 갈등을 봉합해야만 했던 후배 사색가들은 ‘수습하는 유형’에 해당한다.

하지만 수습이 단순히 양비론이나 양시론일 수는 없다. 선배들의 입장들은 각자 나름의 관점과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보라. 어찌 운동과 변화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세계의 법칙이 있다면 대립 속의 조화 그 자체가 아니고 뭐겠는가! 흠. 만약 모든 것이 변할 뿐이라면 진리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확고부동한 토대를 인정하고 한갓 가상에 불과한 잡스런 것들은 잊어버리는 게 어떤가! 이런 한 치 양보 없는 설전은, 그러나 철학사에서 다원론자라 불린 이들이 등장하면서 진정 국면을 맞는다. “변치 않는 존재를 부정할 순 없지만, 그게 꼭 하나일 필요가 있을까?”

시칠리아 출신 엠페도클레스는 의사와 웅변가, 시인과 철학자, 과학자와 예술가, 정치가와 사제라는 직함을 넘나 들 정도로 오지랖 넓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였으니 어찌 존재를 둘러싼 선배들의 난투극을 지켜보고만 있었겠는가! 그의 훈수를 들어보자. “때때로 하나는 다수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로부터 다시 다수로 되돌아간다. 유한한 생명체의 생성과 죽음은 이처럼 이중적이다!” 불변하는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네 개의 ‘뿌리’, 즉 4원소다. 그렇다면 변화는? 사랑과 증오의 보이지 않는 힘이 이들에게 작용한 결과, 사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물의 ‘뿌리’가 좀 유치해 보였는지 이를 ‘씨앗’으로 고쳐 부르며 새 도전장을 던진 이가 밀레토스의 현자 아낙사고라스다. 그가 말하는 씨앗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신봉하는 ‘줄기세포’를 닮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떻게 털 아닌 것에서 털이 생기고, 살 아닌 것에서 살이 생기는가?” 그 이유는 “정신(누스)을 제외한 모든 것에 모든 것들의 부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불변의 존재는 만물의 부분과 성질을 가지는 무수한 씨앗들이며 이들의 비율에 따라 누군가는 영장류로, 누군가는 설치류로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자신이 ‘대단한 인간’(big man)이라고 떠벌리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답해주는 건 어떨까? “니(인간) 안에 걔(쥐) 있다!”

당시 압데라는 ‘바보들의 도시’로 유명했다. 그런데 예외 없는 규칙 없듯, 이곳에서도 전통(?)을 깨고 데모크리토스란 한 천재가 태어났다. 그는 앞선 이들의 사상에서 몇 가지 불편함을 느꼈다. 우선 ‘뿌리’나 ‘씨앗’ 같은 아르케가 특정한 성질을 갖는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물의 운동이 ‘애증’과 ‘정신’ 따위의 외적인 것에 휘둘리는 것도 꼴사나워 보였다. 결국 그는 ‘원자’와 ‘허공’의 도입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순수 양의 최소단위 원자는 결합과 분리를 통해 사물을 낳고, 허공 속을 떠돌며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운동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윤리적 삶에 있어서도 자신의 원자론을 철저히 고수했다는 점이다. 그가 ‘존재’와 ‘변화’의 모순을 진정으로 해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연’과 ‘자유’, 즉 인간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또 다른 골칫거리를 던져주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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