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_⑥소크라테스와 제자들

그리스인들의 상업적 감각은 교육 분야에서도 빛을 발했다. 사람들의 향학열에 불을 지핀 선구자는 물론 소피스트들이었다. 아고라의 ‘블루오션’에 뛰어든 그들을 일약 스타로 성장시킨 무대는 올림픽 경기였다.

초기 올림픽엔 웅변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한 번은 루키아노스란 자가 경연에 참가해 일등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바로 ‘모기에 대한 찬미’였다는데, 지금도 그 내용이 궁금할 지경이니 당시엔 오죽했을까? 이제 사람들은 웅변술이라는 스펙을 쌓기 위해 어떤 금액이라도 지불할 준비가 되었다.

시민들이 소피스트에게 열광하는 만큼, 자신을 진지한 학문의 탐구자로 여겼던 지식인들의 반감 역시 증대했다. 짐작하다시피 그들은 지식의 거래 행위 자체를 경멸했다. 하지만 첨단 상업도시 그리스에 어찌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있으랴. 그러니 비난의 이면에는 한 강좌 당 노동자 백일 품삯을 받은 프로타고라스 같은 이에 대한 질투심이 있지 않았을까?

사실 더 큰 비난의 화살은 그들이 설파한 내용을 향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해될 수 없다. 이해된다 할지라도 남에게 전할 수 없다!” 이러한 고르기아스 류의 지독한 회의주의에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진리를 의심하는 것과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의심이 기존의 관행을 허물고 새로운 발견을 추동해내는 힘이라면, 부정은 모든 것을 체념함으로써 결국 관습을 용인하는 면죄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모 멘수라(homo mensura)!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라는 소피스트의 인본주의적 입장이 점차 회의주의로 이동해 감에 따라 적대자들의 입지 또한 굳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볼품 없는 외모와 남루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크라테스가 불세출의 인물로 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자충수가 있었다. 객관적인 진리가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들의 말은 진리인가, 허위인가?

사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와 문제의식이 같았다. 초기의 자연철학에서 삶의 문제로 관심을 돌렸을 때 그가 한 말을 들어 보자. “나무와 자연이 무얼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인간이고, 그들은 모두 여기 도시 안에 있는데!” 다만 선대의 ‘아르케’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해결책이 달랐을 뿐이다.

물론 그의 아르케는 인간의 본질, 즉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지고의 가치로 바뀌지만 말이다. 아테네의 성가신 등에는 뚜렷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란 질문으로 굼뜬 그리스인들의 엉덩이에 일침을 가했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조차 각자의 ‘선’을 찾아 나섰고 따라서 그 답은 그들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했다. 제자들의 명단은 플라톤의 『파이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형 직전의 소크라테스가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감옥이 이 책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냉소하며(cynical) 개 같은(kynicos) 삶을 산 키니코스 학파의 안티스테네스는 개인의 평정한 삶을 선의 전형으로 삼았다. 반면 쾌락주의자(cyrenaic) 아리스티포스가 창설한 키레네 학파는 육체적 즐거움을 포함한 쾌락만이 가치 있음을 설파했다.

이후 우리는 이런 가치론의 대립이 더욱 더 확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헬레니즘시대의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 근대 이후 이성 우위와 감성 중시의 다툼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자가 주도권을 잡게 된 데는 플라톤의 ‘저주’가 한 몫 했다. 그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스승의 곁을 충직히 지킨 안티스테네스와 달리, “확실히” 그 자리에 없었던 아리스티포스는 같은 시각 쾌락의 도시 아이기나에 있었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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