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내우외환’이라 했던가. 잘 나가던 그리스가 페르시아전의 승리로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는 동시에 몰락의 전조가 보이기도 했다. 외부로부터의 환란이 그치면 내부에서의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리스의 패권을 둘러싼 두 강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대립각을 세워만 갔다. 급기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무너지더니, 60여 년이 지난 뒤 마케도니아의 침공으로 고대 그리스는 그 수명을 다했다. 아테네의 붕괴는 민주정의 몰락을 가져왔고, 대화와 토론의 부재는 결국 사색의 토양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척박한 토양에선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법! 그리스의 지성계는 보다 실하고 튼튼한 사색의 씨앗을 배출해 퍼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그 적임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크라테스만한 인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도시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이미 독미나리 주스를 들이키지 않았던가? 뒤늦게 후회해도 늦은 경우가 많다지만, 아직 송아지들이 남아 있다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을 마냥 나무랄 일은 아니다. 소크라테스 옹에겐 쟁쟁한 제자가 일곱이나 있었으니까. 남은 일은 그들 중에 ‘적통’을 찾아내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문적 출세의 길에는 두 해법이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불후의 작품을 남기던가, 아니면 자신의 추종자라도 만들던가! 아테네엔 운 좋게도 이 둘을 동시에 걸머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7인 제자 중 하나인 플라톤이다. 대부분 저작에 스승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정도로 소크라테스의 복심(腹心)을 자처하던 그는 아카데미아란 교육기관을 세워 후학 양성에도 힘썼으니 이정도면 스승의 공식적 승계자로 손색이 없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문하생에서 경쟁자로 승격할 무렵엔 스승의 후광조차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플라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경험했다. 그리고 폐허의 도시는 그에게 한 가지 의문을 남겼다. “번영을 구가하던 아테네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는 필경 진리의 상대성에 빠져 질서와 조화를 뒤흔든 소피스트파의 언행과 한갓 감각적 쾌락에 미혹돼 고귀한 가치를 폄훼한 키레네파의 품행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심증은 이후 스승의 충정을 외면한 민주정의 타락상을 경험하면서 확증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절대적 도덕의 기준을 확립하고 그에 따른 인간 및 국가상을 제시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리라!

확고한 도덕을 급변하는 현상계에서 찾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그것은 모방에 불과한 지상세계에 원형을 제공하는 영원불변의 세계, 이데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지도자의 자격도 이를 알아볼 줄 아는 철인(哲人)으로 제한된다. ‘아테네 학당’의 스승이 하늘을 가리키자 의심 많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꾸로 땅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원상과 모상으로 쪼개진 세상에서 이데아에 오를 신묘한 사다리라도 있단 말인가? 지혜를 핑계로 다수를 지배하는 소수의 특권은 자칫 냉혹한 철인(鐵人)의 통치를 낳는 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과 지상을 가르는 스승의 도식을 부정했다. 이데아도 부정한 걸까? 그렇진 않다. 단지 사물의 고유한 본질을 부여하는 형상(영혼)으로서 질료(육체)와 함께 공존할 뿐. 각자가 고유한 만큼 사회 역시 별난 통치자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정이 아닌 시민 다수가 참여하는 공화정을 모범으로 제시했다. 좌충우돌 두 선장이 만든 ‘노아의 방주’는 앞으로 어디쯤 정박하게 될까? 삿대 둘(민주정, 공화정)과 돛대 하나(왕정)에 의지한 배(공화정)라면, 그 도착지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공화국 로마! 앞으로 이곳이 우리의 새로운 여정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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