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과잉의 시대’, 이름도 많지만 어쩌면 요즘은 ‘해석 과잉의 시대’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 마디 말보다 거기에 붙는 주석(註釋)이 더 많은 그런 시대 말이다. 문정희의 시인을 위하여는 그러한 세태에 부쳐진 시로 읽힌다. 시인의 죽음 앞에 바쳐진 수많은 말들!

한 번 시비도 걸어보고 싶고 찬사도 바쳐보고 싶고 왜 할 말이 없겠는가만, 어쩌면 시인은 그냥 ‘말’을 가지고 신나게 한 세상 놀다 갔을 뿐인지도 모른다. “진실로 그를 때릴 수 있는 것은 그의 시뿐이다”라는 시구는 그런 측면에서 조금은 ‘슬프게’ 읽혀야만 한다.

저 구절이야말로 ‘해석의 과잉’을 교묘하게 꼬집고 있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해석의 과잉에 대한 경계가 ‘해석의 금지’를 뜻하지도 않는다. 이제 말을, 아니 말에 붙은 주석들을 지워보자.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삶에 가장 충실한 본능적 실천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언어의 진실은 멀리 있을 테지만, 그 진실을 더 멀리 있게 하는 것 역시 언어가 아닌지 진솔한 반성이 필요할 때이다.

자, 그럼 우리도 이제 뭇 시인들처럼 말해보자. 언어의 숲에서 신나게 뛰어놀다가 ‘잘 놀고 간다’라며 또 한 판 수다를 떨어보자.

박성필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