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세계 인도 과거 : 무굴제국의 최대 건물 타지마할

인도의 타지마할은 중국의 만리장성, 이탈리아의 콜로세움과 함께 新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천 마리가 넘는 코끼리와 이탈리아, 프랑스, 이란 등 각지에서 불러들인 2만여 명의 유명한 장인들이 타지마할 건축을 위해 동원됐음에도 불구하고 완공되기까지 무려 22년이 걸렸다고 한다.

타지마할이 건축될 당시는 17세기 말의 무굴제국 시절이었다. 1526년 바부르에 의해 세워진 무굴제국은 그의 손자 악바르에 의해 번성했다. 악바르는 영토를 확장하는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분야에서 무굴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도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는 융화정책을 취했다. 이에 악바르의 손자 샤 자한은 탄탄한 재정을 기반으로 타지마할의 축조에 나설 수 있었다.

타지마할의 내·외부 벽면은 보석과 준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돼 있다. 여기에는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이 활용되었다. 즉, 하얀 대리석에 각각의 색깔을 지닌 대리석을 파 넣는 방식으로 모든 벽의 무늬를 새겼다고 한다. 이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만든 타지마할에는 무굴제국의 제 5대 황제 샤 자한의 사랑이야기가 숨어 있다.

사랑으로 지어진 타지마할

열여섯 살의 샤 자한은 새어머니 누르 자한의 조카인 아르주만드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하게 된다. 샤 자한은 왕비에게 ‘뭄타즈 마할’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줬다. 뭄타즈 마할은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든 함께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를 낳는 도중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샤 자한은 그녀의 유언대로 그녀를 위해 만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완공된 것이 무굴제국 최고의 건물인 타지마할이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에 동원됐던 기술자들이 더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지 못하도록 그들 모두의 손목을 잘랐다고 하니, 타지마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라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샤 자한은 타지(화이티)마할에 뭄타즈를 묻어두고 자신의 묘로 사용할 블랙마할을 만드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샤 자한은 타지마할 건설에 이미 많은 국력을 사용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이에 불만을 품고, 결국 아버지를 가두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샤 자한은 죽어서야 뭄타즈 마할의 옆에 자리할 수 있었다.

타지마할의 섬세하고 치밀한 장식

무굴제국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이다. 무굴시대 초기 악바르가 건립한 건축물은 페르시아 양식과 인도 재래의 형식을 합친 힘찬 것이었고, 샤 자한 황제는 그보다 화려한 외형과 정교하고 치밀한 장식을 중시하였다.

타지마할을 살펴보면 당대 무굴제국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무굴제국의 건축양식은 페르시아인이었던 바부르의 아내 때문에 페르시아 양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타지마할은 ‘왕관모습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타지마할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천정의 돔양식이다. 천정의 돔양식은 불가사의하게 여겨지는데, 천정의 거대한 돔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돌로 돔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도 놀랍지만, 만약 그렇더라도 그 돔을 어떻게 기둥 위에 올려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타지마할은 앞쪽으로 쭉 뻗어난 정원과 호수 때문에 더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있다.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무덥고 먼지가 많은 인도의 기후 때문에 고향의 정취를 느끼기 위하여 정원 가꾸기를 즐겼는데, 이것이 이어져 내려와 건물 앞에 정원을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타지마할 정문 바깥 쪽 벽에 새겨진 코란 글자와 꽃무늬를 보면 감탄이 나온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같은 너비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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