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세계 인도 현재완료 : 인도의 국부, 간디

인도여행을 시작할 때다. 처음에는 1000루피와 500루피로 환전을 해서 몰랐었는데 물건을 사고, 밥을 먹으면서 돈을 쓰다 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의 지폐에는 천원에 퇴계이황, 5천원에 율곡이이, 만원에 세종대왕 등 화폐마다 다른 사람이 그려져 있는 반면, 인도 화폐의 앞면에는 모두 같은 사람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바로 인도의 국부라고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이다.

이처럼 화폐만 보더라도 간디가 인도의 대표적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 공책에도 간디 얼굴이 새겨져 있고, 가는 도시마다 “엠지 로드(MG Road), 즉 ‘마하트마 간디 길’이 있다. 또한, 간디 동상뿐만 아니라 간디 이름을 붙인 공항, 박물관, 공원 등이 셀 수 없다고 한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 위치한 간디기념박물관을 방문했을 당시, 그가 총을 맞고 죽은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를 자랑스럽게 청소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물관 내의 어떤 곳들은 행여나 더러움을 탈까 신발을 벗고 가야 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에게서 마하트마(Mahatma :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후부터 인도인들에게 마하트마라고 불린 간디. 그의 삶과 사상 속으로 빠져보자.

칭송받는 삶, 그리고 죽음
간디의 일화는 유명하다. 변호사로 활동했을 당시, 간디는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다. 간디는 초청인이 끊어준 일등칸 표를 갖고 기차에 올랐다. 한 승객이 그를 발견하고는 역무원을 불러 내쫓았다. 이는 그뿐만이 아니라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 유색인들이 받는 차별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일화는 소금행진 이야기다. 1930년 당시의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통제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여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간디는 1930년 3월 12일 70명의 동지와 함께 출발, 24일을 걸어서 바닷가의 소금을 집어 드는 행동을 하였다. 이는 영국 국왕의 전매 사업인 소금에 대하여 인도 바닷가의 소금을 인도인에게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묵시적, 비폭력적 행동이었다. 행진이 계속되면서 6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투옥됐다.

간디는 독립운동의 선두주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영국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전쟁 후 승전국이 된 영국이 더욱 강경한 식민정책을 실시하자 그에 항의하기 위해 반영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했다. 하지만 반영운동을 주도하던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 간의 합의가 실패로 끝나고 대규모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 독립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하지만 간디가 그토록 열망하던 종교를 뛰어넘는 통합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뛰어난 인물을 신이 질투하신 걸까. 힌두교 광신자들에게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이슬람교도르 인정하는 간디가 적으로 보였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 고두세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God is truth, Truth is god
간디 박물관 어딘가엔 ‘Truth is god’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간디 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은 신(神)이다. 처음 간디는 ‘God is truth’라는 개념을 깨달았다. 간디는 신은 곧 진리인 동시에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Truth is god’의 개념으로 나아갔다. 궁극적 최상위 개념을 신에서 진리에 대한 탐구로 변경하여 주장한 것이다. 간디는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아실현을 하려고 노력했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만인이 신의 창조물이다. 사람은 누구나 신성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만인에게 가능하다고 나는 항상 믿고 있다”고 말했다.

간디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실천으로 옮겨 힌두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불가촉천민과 신체적 접촉을 하고 식사를 함께 하며 불가촉천민을 양녀로 입양했을 뿐 아니라 청소부 카스트의 동네에 몇 달간 머물 때는 손수 화장실 청소까지 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이나 ‘피억압카스트’처럼 최하층 카스트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름들 대신 ‘신(Hari)’의 자식들(Jan)’을 의미하는 ‘하리잔’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카스트 제도 때문에 힘든 삶을 보냈던 인도인들은 간디의 사상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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