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10) 교부철학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마지막으로 오현제(五賢帝)의 치세가 끝나자 로마의 기운도 쇠락해져만 갔다. 폭정과 반란 속에서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등극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빨 빠진 무력한 호랑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최후의 방법은 뭘까? 그것은 ‘가죽’을 남기고 장렬히 전사하는 것!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교를 전격 공인한다. 그리고 380년 테오도시우스가 정식 국교로 선포하면서 그동안 박해 속에서 내성을 키워왔던 그리스도교는 날개를 달게 된다.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한 그리스도교는 초기만 해도 소수 마니아들을 제외하곤 대다수 로마시민들에겐 낯설게 여겨졌다. 다신교적 전통에서 유일숭배와 성찬제례는 대표적인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폭군의 대명사 네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세를 확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사도 바울이 있었다. 지중해 동부를 거점으로 꾸준히 포교에 나선 그의 활약으로 그리스도교는 점차 대중의 관심과 이목을 끌 수 있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반목하는 지파들 간의 통합과 외부로의 끊임없는 확장이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코린토스에서의 눈물의 편지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독창성을 위해 유대교와 고대철학과의 단절을 강조했다. 하지만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유대교의 영향력과 당대 지식인들의 사고에 뿌리 깊게 침투한 사색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녹록할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양자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새로운 논쟁의 씨앗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저술가를 겸하던 신학자 집단, 교부(敎父)들에 의해 지펴졌다.

‘그리스도’는 구세주를 뜻하는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구세주 예수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됐다. 그는 신인가, 인간인가? 유일신앙의 철저한 대변자 아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신앙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격하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게다가 유일신만 강조한다면 유대교와 뭐가 다른가?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에선 하나라는 삼위일체설로 맞섰다. 결국 공의회는 후자에게 진리를, 전자에게 파문을 안기며 종지부를 찍었다!

교리논쟁이야 권위로 정리할 수 있다지만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신의 섭리 vs 인간의 의지. 오리게네스는 자유의지가 올바른 신앙을 찾기 위한 길잡이로 주어졌다며 봉합하려 했지만 펠라기우스는 만족하지 못했다. 신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죄 역시 인간의 자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원죄 따윈 없다! 원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회는 비상이 걸렸고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진화에 나섰다. 그는 타락과 악의 근원을 ‘존재의 결핍’에서 찾았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은 오직 자신의 외부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결핍된 존재가 어떻게 전능한 신과 만날 수 있을까? 이는 두 사이를 잇는 매개, 즉 교회를 통해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재치에 한 숨 돌린 교회는 논쟁의 완전한 종식을 기대했겠지만, 실은 본격적인 논쟁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리스도교의 내실화에 기여했으니 그리 좌절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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