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11)스콜라철학

이렇게 자문을 한 뒤, “결코 짖을 수 없다!”고 자답한 이가 바로 스피노자다. 얼핏 보면 황당해 보이는 문답을 굳이 그가 한 이유는 이것이 서양 중세의 천년 동안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흔히 중세를 ‘사상의 암흑기’로, 당시의 철학을 ‘신학의 하녀’로 부르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문예의 부흥으로 알려진 르네상스는 중세 초기에도 존재했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가 전폭적으로 후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 시기를 그의 왕조 이름을 따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부른다.

때로 역사는 왕도 차별한다. 담덕은 영토의 확장으로 광개토‘대왕’으로, 이도는 한글의 창제로 세종‘대왕’이란 칭호를 후대에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를이야 말로 ‘大帝’라 불릴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두 가지를 다 완수했으니까!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외연을 확대한 그로서는 이제 내부의 결속과 통일이 시급했다. 비잔틴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로마의 우두머리로서 그리스도교의 성스러운 교회를 이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내부적으로는 신앙의 지식으로 강화하는 것을 책무로 삼고자 합니다!”

신앙과 학문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학교만한 것이 없다! 수많은 인재들이 왕궁으로 몰려들었고 왕의 인가 하에 학원들이 속속 세워졌다. 당시 교수를 칭하던 ‘doctores scholastici’에서 ‘스콜라’란 말이 나왔다. 국교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그리스도교는 이제 학문으로서의 ‘공인’을 필요로 했다. 한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앙을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외쳤지만 더는 통하지 않는다. 문헌학자 에리우게나는 이성과 계시 모두 진리의 근원이며 양자는 상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참된 진리는 참된 종교이며, 참된 종교는 참된 철학이다.”

그런데 양자의 조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창조·타락·구원·완성이라는 구원의 역사에서 힌트를 얻어 자연을 네 단계로 구분했다. 여기서 ‘창조를 수행하는 원리’인 자연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창조를 초월하는 완성’인 자연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신과 그 원리의 존재를 이성으로 논증하려던 그의 충정은 엉뚱하게 범신론으로 몰려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의욕은 좋았으나 불경함이 문제로다! 보편자는 이름에 불과할 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자라는 학설의 등장은 교회의 초조함을 더욱 부추겼다.

가톨릭(catholic)이 ‘보편적’이란 뜻을 지닌 것에도 알 수 있듯이 보편자의 실존은 교회의 존망이 달린 문제다.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과 함께 구원자로 등장했다. ‘바보의 논증’으로도 유명한 그의 신 존재 증명은 누구라도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지닌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참으로 완전하려면 관념 속에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현실로 존재해야만 한다! 반면 ‘프랑스의 소크라테스’로 불리던 아벨라르는 그 별칭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선배의 등을 사정없이 쏘아댔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인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감각과 지성. 전자는 실재하는 개별자를 인식하지만 후자는 상상 속에서 관념을 만들어낼 뿐이다. 따라서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입장은 관념의 표상을 존재자로 착각한 것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논쟁은 더 이상 ‘순수’ 신앙에 머무르지 않는다. 물론 신학의 입장에선 불순해 보이겠지만 철학의 입장에선 부흥의 전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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