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12) 이슬람철학

신학이 지배하던 중세에 사색가란 직업은 아무래도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믿음과 순종의 세계에서 의심과 논쟁은 사치스럽거나 불경스러운 단어였기 때문이다. 처세에 밝은이들은 신앙과 이성을 적절히 조화시켜 추앙받는 위치로 승격될 수도 있지만 고집스런 이들의 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종종 박해를 불러왔다. 그나마 플라톤의 영향이 강했던 초기만 해도 이데아의 신학적 친화성 덕분에 큰 갈등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데아를 개별자의 지위로 하락시킨 아리스토텔레스가 재조명받기 시작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잊혔던 그의 사상을 유럽에 전파한 이들은 놀랍게도 이슬람 세계의 학자들이었다. 유럽에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있다면 아랍엔 ‘이슬람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특히 아바스 왕조기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군주들 덕에 종교적 관용과 학문적 교류가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그리고 광범위한 학문 영역에 대한 관심은 자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조명 받을 수 있는 튼튼한 토양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이슬람교와 고전철학의 만남은 신앙이냐 이성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단순한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부터 주목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스승의 영향으로부터 출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은 플라톤 사상의 보완 과정에서 탄생했다. 선구자는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였다. 열 살에 코란을 달달 외우고 커서는 자신의 장서를 옮기는데 낙타 사백여 마리가 필요하다며 왕궁으로 들어와 살라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약간의 과장이 섞였겠지만 그의 비상한 능력과 학문적 열정을 짐작케 해준다.

이븐 시나는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적절히 혼합했다. “보편자는 개별자에 앞서 존재하고, 개별자의 속에 존재하며, 개별자의 뒤에 존재한다!” 알쏭달쏭한 그의 말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절묘한 균형이 녹아 있다. 창조하는 신은 사물에 ‘앞선’다. 동시에 자연으로서 신은 사물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인식으로서 신은 사물의 경험 ‘후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로써 그는 보편과 개별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다분히 질료 속에 형상이 내재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의도한 것이었다.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이븐 시나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 푹 빠진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븐 루슈드다. 오죽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데만 26년이 걸렸을까. 아무튼 그의 노력 덕에 유럽은 새로운 학문적 수혜를 받을 수 있었고 그의 라틴어 이름을 딴 아베로에스파가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자연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신의 영역인 능산적 자연은 신학적 진리를 가능케 하고 사물의 영역인 소산적 자연은 철학적 진리를 보증한다. 따라서 양자는 더 이상 대립이 아니라 양립 가능한 것이다.

이븐 루슈드의 유명세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슬람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기가 많으면 질투도 많은 법! 동시대 화가 고촐리는 아퀴나스의 발밑에 엎드려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고전 철학을 전파했던 이슬람 학자들의 노력이 없었던들 과연 스콜라철학의 왕으로 불렸던 아퀴나스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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