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13)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탄생’과 ‘제국의 통치’라는 유산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은 언제나 동쪽의 기세에 눌려 지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뒤 문명의 수혜를 받은 동쪽에 비해 서로마의 수명은 짧았다. 게다가 이슬람의 세력화와 서진정책으로 분열돼 있던 유럽의 군주국들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지역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중심을 잡아준 교회의 힘이 컸다. 비록 천상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있었지만 ‘카노사’에서 황제를 ‘굴욕’시킨 이후 교황의 주가는 치솟았고 더 나아가 유럽의 재건마저 꿈꾸기 시작했다.

내부가 정리되었으니 이제 바깥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교황 우르바누스가 주창한 십자군 전쟁은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외부의 이교도들도 제거할 수 있는 ‘환상’의 해법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성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원정에선 번번이 죽을 쒔고 급기야 성전의 명분마저 약탈과 살육으로 변질되면서 체면마저 구겼다. 하지만 구겨진 건 교황과 교회의 체면일 뿐 지중해의 무역권을 장악한 속세의 권력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거꾸로 신성한 중세의 해체를 알리는 신호탄을 쏘았다.

실추된 명예의 회복을 위해 ‘예수의 대리자’를 자치한 교황 인노켄티우스가 응급처치에 나섰다. 그는 교회 개혁, 이단 금지, 교리 강화에 사활을 걸었고 그에 따라 수도원, 종교재판소, 대학의 설치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계획에 미숙한 집행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것이 십자군 원정의 실패에서 얻은 값진 교훈이 아니었던가!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유능한 적임자에 목말랐고 이러한 교회의 요청에 화답한 이가 후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뉴턴 사이의 가장 위대한 서양 사상가”로 불리게 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이탈리아 아퀴노 지방의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수도원장의 화려한 삶 대신 소박한 탁발수도사를 꿈꿔 주위를 당혹케 했다. 놀란 부모가 유학길에 오른 그를 납치, 감금한 채 설득과 회유를 했다는 일화는 끔찍한(!) 자식사랑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쇠고집 또한 잘 보여준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길을 갔으니까. 유학시절 토마스는 우람한 체구와 조용한 성격으로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라고 불렸다. 하지만 스승의 적극적인 후원 덕에 이른 나이로 교수직에 오를 수 있었고, 제자 역시 이런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신학의 체계화를 위해 그는 아랍에서 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이중 진리론에 머문 아베로에스와 달리 그는 신학과 철학의 조화에 방점을 찍었다. 믿음에만 의존하지 않는, 이성의 도움을 받는 그런 신학은 없을까? 그는 전자를 계시신학, 후자를 자연신학으로 나누고 자연에서 신을 증명하는 논증의 제시를 통해 후자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창조와 구원 등 핵심 교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이성의 도움만으로도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는 그의 말에서는 신학자보다 철학자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치명적인 유혹’과도 같은 존재다. 신학의 체계화를 위해선 그의 사상이 불가피하지만 일단 그를 받아들이고 나면 신학의 위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말년의 토마스는 다소 맥 빠지는 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한다면 한낱 지푸라기처럼 느껴진다.”
“영혼이 육체와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은 영혼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성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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