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14) 후기 스콜라학파

지도자의 리더십이 연일 화제다. 그런데 리더십의 진가는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정직한 자라면 혼란의 원인을 찾아내서 해결하는 데 전심하지만 음흉한 자는 내부의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때문에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구호가 요란할수록 그들이 원하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불순한 의도가 발각될 경우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전쟁을 원하지도 않는다!”는 말처럼.

십자군 전쟁이 꼭 그랬다. 내부단속을 위한 무모한 전쟁은 교황의 리더십을 바닥까지 추락시켰고 이참에 군주들은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화끈한 프랑스는 교황을 납치, 감금하고 교황청을 자국으로 옮기는 ‘아비뇽의 유수’를 감행했다. 노련한 영국은 이를 빌미로 프랑스의 교황청을 대놓고 무시했다. 실속파 독일은 북이탈리아의 노른자 자치도시를 둘러싸고 교황과의 대립을 강화했다. 이러한 위기에도 교회의 오만과 독선은 계속됐으니, 내부로부터 개혁의 요구가 빗발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교회의 타락을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한 건 수도원이었다. 타락의 정점에 선 교회의 이미지를 복구하기 위해 그들이 내건 기치는 ‘청빈’과 ‘금욕’이었고, 이단척결이라는 교리적 활동에 치중한 도미니크회보다 본연의 역할에 더 충실했던 곳이 바로 프란체스코회였다. 하지만 정화의 기능에도 한계가 있는 걸까? 깊어진 상처에 뿌려진 소금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작은 순조로운 듯했다. 프란체스코회 총장으로 오른 보나벤투라는 초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바탕으로 이성보다 순수한 신앙을 강조했으니까.

신앙의 강조는 이성의 우위 혹은 조화를 주장한 토마스의 주장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여기에는 아마도 도미니크회의 핵심주자인 토마스에 대한 경쟁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중세 후기에 다시금 신앙의 강조라니! 하지만 그의 진짜 의도는 이성에 대한 회의에 있었다. 이를 ‘의지’의 우위로 강하게 해석한 이가 ‘체계의 파괴자’란 별명으로 유명한 둔스 스코투스다. 물론 이때의 체계란 토마스의 체계이고. 그는 토마스의 자연신학을 공격했고 자연만을 이성의 영역에 국한시키고자 했다. 계시는 계시요, 이성은 이성이로다!

‘파괴자’가 있다면 ‘건설자’도 필요한 법! ‘거룩한 창시자’로 불렸던 윌리엄 오컴은 그나마 보편자의 실존만큼은 인정했던 선배 둔스와 달리 극단적인 유명론으로 치달았다. 보편자는 이름에 불과할 뿐 실재하는 것은 경험 가능한 개별자이다. 신의 섭리 역시 인간의 이성이 아닌 믿음과 계시에 대한 의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주의주의(主意主義)는 두 가지 놀라운 결과를 초래했다. 진리를 독점한 교회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 하나라면 자연에 대한 탐구의 확대는 다른 하나였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종교개혁’과 ‘자연과학’의 부흥으로 이어져 중세를 끝장내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다. 중세의 끝은 근대의 시작이다. 흔히 전자를 ‘어두운 밤’(암흑)에, 후자를 ‘밝은 빛’(계몽)에 비유하지만 양자는 단절보다 연속의 속성을 더 갖는다. 근대 철학의 두 흐름,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이미 토마스와 윌리엄의 대결에서 시작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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