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한 달이 지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민속촌에는 평소의 3∼10배 가까운 관광객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하회탈의 웃음처럼 누구나 웃음 가득할 것 같은 하회마을을 찾아가 봤다.


낙동강 줄기가 하회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다. 강줄기가 흐르는 하회마을의 뒤편에는 산이 있으니 배산임수의 지형이라 하겠다. 양반이 살되, 그를 모시는 종이 양반을 조롱하는 하회별신굿놀이가 용인되었던 하회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마을답게 마을 입구부터 사람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외국인 관광객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에 둘러싸여 있는 정재수(65)씨는 “천성감리교회 영어예배부에서 단체로 왔다. 이번에 하회마을이 유네스코에 등재돼 교회에 다니는 외국인들과 찾아오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막 탈춤을 보고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탈춤을 재밌게 봤지만 함께 보는 외국인들을 이해시키기 어려웠다”며 당황했던 순간을 얘기했다. 하회마을에 외국인 관광객은 많지만, 극을 진행하면서 자막을 보여주는 등의 외국인을 위한 배려는 내부적으로 아직 부족한 듯했다.

하회탈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알아요? 허도령이란 자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지요. 허도령은 ‘별신극에 사용할 탈을 파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들게 됐는데, 이 탈을 만들 때까지 아무도 그 과정을 지켜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가 허도령이 오지 않자 너무 궁금해서 문안을 들여다 본 거에요. 허도령은 11개의 탈제작을 마치고 이매탈의 턱만 만들면 탈 제작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처녀가 들여다 보는 바람에 허도령이 피를 토하고 죽어서 이매탈은 하회탈 중에서 유일하게 턱이 없다고 합니다


길을 걷다 보니 탈을 파는 곳에 사람이 북적거린다. 하회탈들이 보였다. 가장 눈에 들어왔던 건 부네탈이다.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눈웃음 짓는 여인의 고혹(蠱惑)적인 미소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하다. 놀이에서 부네는 사회 지도층인 스님과 양반, 선비의 위선(僞善)을 여지없이 드러내어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기녀의 신분으로 등장하곤 한다. 반면, 가장 웃음을 자아냈던 탈은 초랭이탈이다. 양반의 종인 초랭이는 꼭 얼굴이 외계인처럼 생겼다. 동공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이마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앞짱구에다, 끝이 뭉툭하게 잘린 주먹코를 갖고 있으며, 이빨이 보이게끔 일그러진 입 등이 모여 괴상한 형상을 드러냈다. 실제 놀이에서는 양반들을 조롱하는 똑똑한 모습을 보이지만 말이다. 분명 어느 장인의 손에서 탄생했을 탈들은, 허도령이라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하회마을에서 별신(別神)굿을 할 때 사용되는 하회탈은, 허도령이 14개를 제작했으나 3개가 분실됐다고 전해진다.

길을 걷다 보니 누런 빛깔의 전통적인 토담이 눈에 띤다. 하회마을은 원체 돌이 없고 강변도 모래나 뻘로 형성돼 있어 예부터 토담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토담 사이에 기왓집과 어울려 한껏 멋드러진 돌담도 드문드문 보인다. 그 옆길을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중년부부가 눈에 띄어 말을 붙였다. 노강원(58)씨는 “아내와 여름 휴가 겸 연천에서 놀러왔어요. 자식들은 다 컸으니 이제 같이 이것저것 보는 게 낙이지요”라고 말했다. 왜 하필 하회마을로 놀러오게 됐냐고 물으니 “옛날을 추억삼아 온 거에요. 어렸을 적엔 다 이런데서 살았으니까”라며 지난날을 추억한다. 부인도 옆에서 “하하, 진짜 옛날엔 다 이런 곳에서 살았었지”라고 맞장구를 친다. 서로가 소년 소녀 시절에 갖고 있던 동심이 떠오르는 듯 아이 같은 웃음을 짓고 중년부부는 손을 놓지 않은 채 걸어갔다.

충효당이 가까워지자 하회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안내했던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난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충효당과 양진당을 꼭 세심히 봐야 한다. 또한 류성룡이 공부했던 병산서원에서 한적함을 느껴보라’고.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인 충효당에 도착하자 다른 곳과는 달리 문화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지킴이를 볼 수 있었다. 문화재지킴이 김순모(55)씨는 학생들에게 이곳저곳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에 줄이 매달려 있는 것은 양반들이 줄을 잡고 몸종들에게 일시키기 편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야”라고 말하곤 줄을 잡고 서보라면서 사진도 찍어준다. 김순모씨는 옛날 이야기도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옛날부터 나는 여기 사람이었으니까 잘 아는데, 어릴 때 물이 깨끗해서 고기잡고 놀았지. 아직도 은어가 여기까지 올라와. 예전에는 연어, 강어, 숭어도 올라왔는데 지금은 댐 만들고, 안 올라오지...”

“아, 종부님 나오시네. 저 분이 류성룡 선생님의 종부님이야. 시골 할머니랑 비슷하지? 그런데 종부님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요즘은 사람들이 하도 와서 밖에는 잘 안나오시는데, 이렇게 매일 한 번씩은 나오셔서 화단을 가꾸시니까”라고 말하곤 류성룡의 종부라는 할머니에게 쪼르르 다가가 인사한다.

덩달아 따라가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류성룡의 종부라는 최소희(82)씨는 마침 잘 왔다는 양 얘기를 꺼낸다. “어디서 왔는가?”, “서울이요”, “서울서 왔는가?”, “예. 요즘 사람들이 많이 오죠?” 자신의 집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린다면 분명 불편할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인데, 자부심 가득한 할머니의 대답이 돌아온다. “최근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에 사람들이 더 많이 오지. 한국에서는 10번 째로 등재된 기라. 우리가 20년을 공을 들이고 난 뒤에 된 거다. 이제는 잘 보존해야 하는 게 문제지” 화단의 잡초를 뽑으며 하시는 말씀에 하회마을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졌다.

다른 곳을 둘러보려고 나올 때면 계속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중앙이 솟아있고 강변으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지는데, 이 때문인지 집의 방향이 각각 제멋대로여서 길이 굉장히 헷갈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길을 잃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중 다행히 길 안내자를 만났다. 자신을 류성룡의 16대 자손이라고 소개한 그는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나야 심심해서 이렇게 종종 돌아다니는 게 낙이에요. 사람들한테 자랑도 하고 재밌지”

그를 만난 것이 운이 좋았던 건지, ‘이 가옥은 사유재산이며, 공개가옥이 아니므로 주인의 양해를 받은 후 출입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비공개의 기왓집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문 앞에는 수십 개의 메주가 달려서 그 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메주가 걸려있는 문을 지나면 2층집이 보였는데 참 예뻤다. 장독은 마당에 가지런히 나와 있고, 바람이 통하는 마루에는 빨래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마루 위에서는 두 분의 할머니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이곳이야 말로 전통을 지키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가.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배우 류시원의 집도 구경할 수 있었다. “여기가 류시원의 집이에요”라고 하는 말에 농담인 줄 알았더니 문 앞에 柳時元(류시원)이라고 한자로 떡하니 써 있다. 류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13대 손으로, 류시원의 집에는 현재 류시원의 아버지만 살고 있다고 했다.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던 것도 매일신문의 기자였던 류시원 아버지의 덕택이란다.

그는 걸어가면서도 쉴새없이 말을 꺼냈다. 하회마을에 대한 그의 자랑을 들으며 삼신당 신목에 도착했을 땐 감탄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640년이나 된 느티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는 종이에 자신의 소원을 쓰고는 나무에 꽂아 놓았다. 왠지 두 사람이 나란히 아이의 미래를 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구경하면 숲에 대한 궁금증이 들기 마련인가 보다. 하회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해발 58m의 부용대에 올라가기로 했다. 길을 안내해줬던 그분과도 헤어져 나룻배를 타고 부용대를 향해 출발했다. 하회마을과 부용대 사이에 흐르는 강물은 거울인 양 햇빛을 반사시켰다. 바위가 많아 낑낑대고 올라간 부용대에서 하회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니 물줄기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래를 보니 다리가 덜덜덜 떨렸다. 사람을 압도하는 경관에 마음도 떨리는 바람에 하회마을의 하늘에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삼신당 신목에서 못다 빈 소원이 꼭 이뤄지기를.

하루 동안 하회마을 전체를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그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하회마을의 가치를 느끼게 됐다.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곳, 단순히 옛 것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옛날로부터 생활방식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현재에 살아가고 있는 곳, 옛 것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안동 하회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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