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 학교 교장이 학생들의 두발과 복장 불량을 이유로 교사들을 체벌했다.

#2.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의 내한 강연에 4천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3. 시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노점상 할머니에게 청와대 시계를 선물했다.


언뜻 보면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세 가지 사건 속엔 우리 사회의 현주소와 미래의 청사진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숨겨져 있다. 사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키워드는 바로 ‘정의’와 ‘공정’ 두 단어다. 지난 광복절 축사에서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공정사회’로 선언했다. 물론 개각 발표 이후 터져 나온 인사청문회의 스캔들과 후보자들의 사퇴, 그리고 화룡점정인 양 물의의 정점을 찍었던 외교통상부 특채비리 사건은 대통령의 진의를 의심케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공정사회 자체를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의 의중이 레임덕을 예방하기 위한 사정의 칼바람 혹은 반대세력의 입에 물리는 재갈이 될 것이라면서 깎아 내리기에 급급한 야권과 시민사회의 비판은 심정적인 측면에선 이해할 수 있지만 결코 세련된 대응방식이라고 보긴 어렵다. 어쩌면 악재에도 불구하고 이슈선점에 성공한 공정사회의 ‘노이즈 마케팅’을 보면서 그들은 당혹감과 불안감을 느낀 건 아닐까? 형식적, 절차적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공정사회를 만들면 어쩌지 하는…. 그런데 진짜 문제는 공정사회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것이 갖는 ‘내용과 가치’에 있다. 만약 공정사회가 ‘공정’과 거리가 멀다면? 공정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미래가 아닌 ‘과거회귀’적이라면? 이런 도발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 보자.



#회초리 교장의 진실
이른바 ‘회초리교장’ 사건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여론은 들끓었고 비난의 화살은 교장의 비상식적 행태에 꽂혔다. 하지만 행위의 결과에 대한 사회적 분노와 달리 그 배경에 대한 관심은, 따라서 사건 속에 은폐되어 있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교장의 물의를 비상식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건너편엔 결코 뉴스거리가 될 수 없는 상식이 만들어진다. 교사의 엉덩이보다 더 약할 게 틀림없는 학생들의 엉덩이는 무수한 생채기에도 불구하고 두발단속과 학생체벌이라는 오래된 관습 덕에 전파를 타지 못한다는 진실.

두 번째 진실은 다음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교장은 왜 교사를 때렸을까? 교장은 “물의를 일으켜 죄송”이 아니라 “교육자적 제스처”였다고 항변했다. 유사한 교육방식은 도처에 널려 있다. 조직의 보스는 분란을 일으킨 부하를 상대파가 보는 앞에서 무자비하게 짓밟는다. 군대의 병장은 휴게실에 집합한 상병들 앞에서 신병의 실수담을 가볍게 내뱉는다. 자, 우리는 이것이 사과를 빙자한 ‘협박’임을, 한층 강화된 기합을 주문하는 위로부터의 압력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학교에서만은 둔감한 걸까? 진실을 외면하려는 폭력의 공모자들은 외려 교장의 행위가 아닌 그의 발언에 분노해야 한다. 교장의 항변은 학교가 조폭과 군대의 은유임을, 이 사회의 작동원리가 여전히 위계와 훈육에 빚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불어 ‘오’선생이 날린 신비한 ‘장풍’의 비밀까지도.



#정의로운 사회의 갈증?
그런데 불의와 야만의 사회에 한줄기 빛과 같은 복음이 전파됐다. 출간 직후 석 달 만에 무려 40만부나 팔려간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가 방한한 것이다. 알다시피 그의 강연에는 4천여 명의 청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일상의 폭력 앞에서는 그토록 둔감한 우리가 이제는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녀야만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보수언론은 대통령의 공정발언의 시너지로, 진보언론은 대통령의 공갈발언의 역효과로 사태를 분석했다. 뜨거운 열기에 갑자기 데인 샌델 역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한국인의 갈증”이 아닐까 짐작했단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과도한 관심, 전세버스로 동원된 수험생들, 객석에서 익숙하게 들려오는 유창한 영어 질의의 진풍경은 ‘정의’라는 낯선 단어보다 ‘경쟁’, ‘입시’, ‘스펙’ 따위의 익숙한 낱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통령만 신나했던 오바마의 한국교육 예찬은 그래서 약간 속은 쓰리지만 진실에 한 발자국 다가선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논술문제의 단골로 롤스와 함께 샌델이 추가된다면, 전쟁을 앞둔 아이들은 이제 ‘정의’라는 이름의 경쟁무기만큼은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다.



#대통령, 할머니 그리고 시계
먼 길을 돌아 이제 공정사회의 진의에 대해 마무리할 시간이다. 지금까지 에둘러 온 그 길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공정한 원칙의 부재로 고통스러워함에도, 정의가 한갓 쇼비지니스와 교육열의 불쏘시개 정도로 치부되는 천박한 현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공정사회’ 담론은 이러한 현실의 타개책이 될 수 있을까? 몇 가지 테제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첫째, 기회의 균등과 결과의 책임! 이는 분배(결과)의 정의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롤스나 샌델조차 비난하는 시장적 자유주의에 가깝다. 결과의 ‘냉혹함’을 상쇄시킬 기회의 ‘균등함’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다면 대통령실장의 발언을 곱씹어보자. “시험 봐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둘째,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 요즘 들어 부와 교육의 되물림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특히 서민층을 중심으로 각광받는 복고풍 구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기형적인 사회에서나 어울릴 법한 말이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다면, 특권적인 용 하나를 배출시키는 것보다 열악한 개천(빈곤)부터 정비하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셋째, 가진 자의 의무, 노블리스 오블리주!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놓여 있다. 신분사회 귀족의 재산쾌척과 전쟁참여는 과연 본받을 만한 것이었는가? 평시엔 달아난 노비를 ‘추노’하지만 전시엔 군역을 위해 그들을 ‘방면’시켰던 ‘노블’들의 고뇌 속엔 체제유지와 기득권 수호의 의지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안타깝게도 기부문화는 세금회피와 마케팅 수단이라는 고전적 비판과 함께 사회적 환원방식(사적/공적)을 둘러싼 논쟁의 불씨마저 될 조짐이다.

마지막으로 묻자. 대통령은 자신을 노블의 상징으로 자처한다. 물론 시혜의 대상은 무수한 할머니들이고. 그동안 목도리와 시계 등의 온갖 성은(聖恩)을 입은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은 과연 미래의 ‘용’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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