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해외취재_터키

이스탄불 공항은 현대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이 그렇듯, 그곳에서 그 나라 고유의 문화나 전통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비행기에 탑승한 덕분에 느껴지는 피로와 서울과는 다른 낯선 불빛들이 이곳이 한국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스탄불 공항을 떠나 지하철을 타고 이스탄불의 구 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광장에 도착해서야 ‘이곳이 터키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터키의 첫 인상과 아나톨리아의 문화들

그리스정교 문화의 뿌리인 비잔틴 제국의 아야소피아와 이슬람의 강자 오스만 제국의 블루모스크가 채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위엄을 뽐내며 서 있는 풍경. 각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들이 마주보고 있는 이 풍경은 터키 공화국 영토의 대부분을 이루는 넓은 고원지대, 아나톨리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나톨리아가 다양한 문화의 융합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인 위치 덕분이었다. 아나톨리아의 북쪽에는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 서쪽에는 에게해가 있다. 즉,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지역인 것이다. 따라서 다른 문화 간 충돌과 문화적 교류가 일어날 수 있었다.

아나톨리아가 국토의 97%를 차지하고 있는 터키는 고구려와 오랫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했던 유목민족 돌궐의 후예, 투르크가 세운 나라다. 그렇지만 아나톨리아의 다른 주인들은 그 땅에서 번영과 몰락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유적과 문화를 남겼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제국 히타이트에서부터, 헬레니즘 시대의 베르가몬 왕국, 그리고 로마의 유적, 초기 기독교의 유적과 비잔틴제국, 이슬람의 문화와 오스만 투르크까지.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어떻게 이 유적들이 다 이곳에 모여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다양성을 몸소 체험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 고대 로마의 유적이 있는 에페소를 구경하고 나왔는데, 터키인 가이드가 근거리에 있는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 신전이나 초기 기독교의 성지인 성모 마리아의 집에 가보지 않겠냐고 물어온 것이다. 한 지역에 그리스, 로마, 초기 기독교의 유적이 있다니…. 우리나라가 아파트 공사를 하다가 유적을 발견할 정도로 유서가 깊은 곳인 만큼, 터키도 발굴될 유적이 무서워 지하철 공사를 쉽게 하지 못하는 나라다.



▲기자가 이스탄불에서 길거리 화가에게서 산 그림. 울루자미와 갈리타 대교가 그려져 있다.

우리의 하루는 아름답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풍경이나 유적의 아름다움 때문에 입이 벌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버섯처럼 생긴 거대한 기암괴석들과 새하얀 소금이 깔린 듯한 석회층 위로 흐르는 온천수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영화 스타워즈를 찍은 계곡에 가도 그랬다. 이러한 풍경을 묘사했다가 기자의 미약한 글 솜씨를 들킬까 두려울 정도로, 그곳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기가 죽었고 부럽기도 했다. 이곳은 나의 메마른 하루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과 아름다움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셀축 지방의 쉬린제 마을에 방문하면서 깨지게 됐다. 하얗게 색칠된 벽들과 짙은 주황빛 지붕들은 터키의 맑은 하늘과 잘 어울렸다. 마을이 산 중턱에 있어, 마치 구름이 산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시골마을 중앙에는 시장이 열렸다. 관광객들과 터키 주민들이 물건을 구경하고 있어 마을에는 생기가 넘쳤다. 맑은 하늘 아래 수공예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과, 빨래를 하러 마을 공용 수돗가에 온 아주머니들과, 터키 전통음료 차이를 먹으며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맑은 햇빛과 하늘에 그들의 하루가 빛났다.

이들의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다. 세계유산이 아니더라도, 입소문을 탄 풍경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리고 그 전에 아름다움을 느꼈던 기암괴석들과 석회층들도 결국에는 그 곳에서 생활하는 누군가에겐, 평범한 하루이자 일상일 것이다.

그곳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은 결국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일상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타인이 보았을 때 나의 일상들도, 내가 매일 지나치는 풍경들도, 내가 알지 못했을 뿐이지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터키를 떠날 때 아름다운 것을 두고 가야한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일상에도 아름다움이 있을테니까.


▲쉬린제 마을에 열린 시장

오늘을 사랑합니다

누구에게나 찰나이더라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양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장만옥과 1분 동안 시계를 같이 본 뒤 그녀에게 “당신은 영원히 이 1분을 기억하게 될 거에요”라고 말했던 것처럼. 터키를 여행했던 그 순간들을 모두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볼 것이 너무 많아서일까? 여행하는 동안, 처음 느꼈던 감정들은 새로운 풍경을 만날 때마다 잊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하는 동안 다음의 이 문장을 되뇌곤 했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기한이 영영 지나지 않길 바란다. 꼭 기한을 적는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지”
-양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 중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자신을 매료시켰던 풍경을 매번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이 끝난 후, 그 여행의 순간들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의 통조림이 가진 유통기한이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파도에 쓸리는 해변의 모래들이 내 발자국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사진을 통해, 그때에 느꼈던 그 감격을 되살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터키를 돌아보는 동안 ‘여행하는 기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 풍경을 좀 더 오래 감상하고 그 감정을 조금 더 오래 가질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여행의 순간들을, 그 날의 현재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열흘 간의 기행에서 그 때 느낄 수 있는 건 모두 느끼기 위해서. 그 순간 경이롭다고, 이런 풍경을 보아서 행복하다고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 다시는 이때와 같은 기분을 느끼기란 힘들테니까.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터키에 다녀온 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지금의 나는 그 나날들을 다 기억할 수 없다. 그렇지만 괜찮다. 터키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나는 웃고 있었다. 거기에서 행복했었다. 그리고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랬다. 그러므로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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