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동안 네이버 검색 1순위에 내 이름이 올랐다” 누가 떠오르는가. 최근 병역비리로 논란을 일으킨 MC몽? 슈퍼스타K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장재인? 아니다. 그는 우리대학출신 최초 국회의원이자 최장 장기수인 이철우(영어영문 84) 동문이다. 그의 인생, 그의 정치 이야기를 들어보자.

80년대, 그리고 늦깍이 대학생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중 학살 후 정권을 잡아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지식인들이 당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폭압적인 정치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84년 학원자율화를 시행했다. 일제가 3·1운동 후 문화정치를 했듯이…” 학원자율화가 시행되던 그 해, 원래 79학번이어야 했던 이철우 동문은 우리대학 영어영문학과에 84학번으로 입학했다. 학원자율화 이후 학내 자치단체 구성이 허용되면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점점 뜨거워지던 시기였지만, 대학생의 본연인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진학 후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가짐에 변화가 찾아왔다.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지만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독서를 통해 우리사회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인식수준을 높여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됐다. 그리고 결심을 했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기 보다는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겠다고” 이러한 그의 결심은 ‘건국대 사건’을 촉매로 빠르게 행동으로 옮겨졌다. 건국대 사건은 86년 10월 전국 29개 대학 2천 여명의 학생들이 건국대학에 모여 반외세, 반독재를 주창하는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진행하다 경찰에 진압된 사건으로 1,525명이 연행되고 그 중 1,297명이 구속됐다. 구속자 중에는 우리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이끌던 사람들 대다수가 포함돼 있었다.

“학교엔 나같이 운동하지 않던 사람들만 남아있었다”고 말한 이철우 동문은 “건국대 사건이후 86년 말, 지금으로 말하면 선대본부장의 역할을 맡아 학생회를 꾸리고 우리대학 학생운동을 총괄하게 됐다”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또 그는 서울 주요대학 학생회와 연합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의 1기 멤버로 주도적인 활동을 했으며, 학생운동뿐 아니라 교내사안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87년 우리대학이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 데 일조했다.

전대협뿐 아니라 반미청년회에도 가담했던 이철우 동문은 그곳에서 현 충남도지사 안희정 씨를 만나 같이 활동했다. 동료 대학생들과 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고 첫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운동을 했던 그는 88년 3월,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됐다. 6개월의 복역 후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 그는 학생운동 활동을 정리하고 일반 기업에 취직했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변화의 의지가 식지 않았던 터일까. 이철우 동문은 민족해방애국전선(이하 민해전)에서 활동하고 92년, 민해전이 대형 간첩단 사건인 중부지역당 사건과 함께 연루되면서 또다시 구속된다.

나의 가족 그리고 고향

89년 같은 학과 1년 후배와 결혼한 그가 구속되던 92년은 그의 딸이 3살이 되던 해였다. 4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던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란다. 하지만 그는 가족 때문에 견딜 수 있었고, 또 감옥에서 딸을 위한 일을 했다. 꿈, 정의감, 역사를 통한 현실인식 그리고 인내. 이 네 가지의 중요성을 딸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어 만든 『백두산 호랑이』라는 동화책이 그것. 그의 첫 번째 저서가 동화책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딸이 동화책을 읽을 수 있는 8살이 되던 해 출소한 이철우 동문은 감옥에서 나온 후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고민 끝에 얻은 답은 바로 ‘한탄강’이었다. 그는 “내가 나고 자란 곳, 작지만 역사가 깊고, 남북을 가로지르며 우리민족에 의미를 더하는 바로 그 한탄강가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하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며 “한탄강 네트워크를 구성해 한탄강 댐건설 반대운동,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 등 지역사회운동을 하고 소식지도 발간하고, 지역행사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0년 가까이 시민운동을 하며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끝내 한탄강 댐건설을 막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굴곡 많은 정치인생, 사랑으로 승화하다

시민운동을 주도하던 그는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 포천·연천 지구당 위원이 되고, 그 다음해 4월 열린 17대 총선에서 당선돼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국회활동을 해보기도 전인 같은 해 12월, 그는 92년 사건을 빌미로 한 ‘간첩조작사건’에 휘말린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의원의 ‘국회의원 간첩 암약’ 발언으로 그의 이름은 일주일 내내 포털 사이트 네이버 검색 순위 1위에 올랐다. 결국 그가 북한노동당에 가입하고, 김일성에 충성을 맹세하며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은 아무 증거가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났다.

한 순간에 논란의 중심이 되어버린 그. 그는 “우리사회를 탈 이념화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 사건 이후로 우리 사회의 이념적인 것이 좀 완화됐다”며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짊어져야 했던 일이었고,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생각도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성경 그리고 하나님. 이는 그의 인생과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존재이자 가치다. 2004년 간첩으로 몰리면서 그는 “내가 주체사상을 믿느냐. 아니다. 내 정치학 교과서는 성경이다”라고 인터뷰를 했고, 올해 초 그 인터뷰는 그의 책 제목이 되었다. “정치는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는 그는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에 대한 사랑, 그것으로 갈등을 조정하고 싶다. 정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펼치자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성경적 가치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살아있다고 생각하며 이 목적을 이루고 싶다”라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전하다

그가 우리 사회에 이루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듯, 그가 정치를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첫 번째 화두도 ‘사랑’이었다. 그는 “정치를 하려면 근본적으로 그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사랑이 고갈되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시대인들은 좀 담대해졌으면 좋겠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했으면 한다”라며 “우리 동문들을 보면 좀 위축된 느낌이 든다. 저평가 우량주라고 할까.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담대해지고, 서로 단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덧붙여, “사회에서 정치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우리대학 동문들이 정계에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다”며 “내가 쓴 책도 많이 사주고 선거할 때도 많이 도와주면 좋겠고”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을 던지는 그. 앞으로 있을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승리를 위해, 나이에 걸맞은 향기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의 계획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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